메뉴 건너뛰기

바람의 냄새

조회 수 1315 추천 수 0 2017.11.16 17:41:22
저자 : 윤의섭 

book and coffee.jpg

 

바람의 냄새

 

윤의섭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아 보라

어느 성소를 지나오며 품었던 곰팡내와

오랜 세월 거듭 부활하며 얻은 무덤 냄새를

달콤한 장미 향에서 누군가 마지막 숨에 머금었던 아직 따뜻한 미련까지

바람에게선 사라져 간 냄새도 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서다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머리 내음

숲을 빠져나오다 문득 햇살에 잘려 나간 벤취의 추억

연붉은 노을 휩싸인 저녁

내 옆에 앉아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어깨를 안아 주던 바람이

망각의 강에 침몰해 있던 깨진 냄새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이게 무언지 알겠냐는 듯이

바람이 안고 다니던 멸망한 도시의 축축한 정원과

꽃잎처럼 수없이 박혀 있는,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전혀 가 본 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가

그런 알지도 못하는 기억들이 문득 문득 떠오를 때에도

 

도무지 이 바람이 전해 준 한 조각 내음의 발원지를 알 수 없다

먼 혹성에 천년 전 피었던 풀꽃 향이거나

다 잊은 줄 알았던 누군가의 살내거나

길을 나서는 바람의 뒷자락에선 말라붙은 낙엽 냄새가 흩날렸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이제 봄이 오기 전까지

저 바람은 빙벽 속에 자신만의 제국을 묻은 채 다시 죽을 것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저자 날짜 조회 수
207 찔레 file 문정희  2018-06-16 111
206 너무 많은 입 file 천양희  2018-05-16 203
205 슬프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 file 함민복  2018-05-16 183
204 강철나비 file 손택수  2018-05-08 182
203 소금쟁이 file 박지웅  2018-04-11 265
202 원시遠視 file 오세영  2018-02-19 435
201 지상의 양식糧食 file 오세영  2018-02-12 443
200 희망에게 file 권귀순  2018-01-03 754
» 바람의 냄새 file 윤의섭  2017-11-16 1315
198 십일월의 데생 file 이규봉  2017-11-08 1161
197 프랑스 요리 file 이인주  2017-09-30 999
196 시간의 거처 file 조삼현  2017-09-03 1230
195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file 김왕노  2017-07-08 1432
194 파도는 저렇게 몸을 세워서 file 오정국  2017-06-01 1564
193 비대칭으로 말하기 file 김은자  2017-04-05 1614
192 無言으로 오는 봄 file 박재삼  2017-03-02 1857
191 꾀병 file 박준  2017-02-11 1838
190 성에꽃 file 문정희  2017-01-08 1974
189 회음부에서 file 이경림  2016-12-23 2111
188 귀뚜라미 다비식 file 함기석  2016-11-23 24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