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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모서리에 컵의 가족사가 있다

조회 수 149 추천 수 0 2020.04.28 18:22:02
저자 : 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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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모서리에 컵의 가족사가 있다                                                    

마경덕



 

한 뼘의 컵에게

마당으로 들어온 민들레 한 송이를 맡긴 적 있다

꽃의 키에 맞춰 반쯤 물을 채우고

식탁 귀퉁이를 붙잡고 버티던 사나흘

뿌리 잘린 봄의 입술이 노랗게 벌어지고

한 모금 홀짝이는 소리에 컵이 출렁거렸다

꽃에게 잡힌

절반의 시간은 꽃의 것이었다

 

제 버릇대로

물이나 주스, 또는 우유를 단숨에 쏟아 붓고

싱크대 간이선반에 나란히 줄을 서던

똑같은 유리컵들

 

식탁 모서리에 어두운 가족사가 있다

자리를 지키던 컵은

자리를 이탈한 불행을 목격했다

찰나에 뼈가 하얗게 흩어진

추락사였다

 

냉장고 문이 열릴 때마다 빈 컵의 표정이 불안하다

 

일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홀로 남은 초조한 눈빛이 나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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