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연필의 밤

조회 수 431 추천 수 0 2021.07.24 08:40:26
저자 : 유미애 




연필의 밤

 

 

-유미애





그 손에 잡히기 전까지 바다는 내게 없던 말이다

 

나를 깨운 그는 또 다른 상자 속의 사람

아침이면 우리는 연둣빛이 다녀간 종아리를 긁었다

밤새 모서리가 쏟아놓은 얼룩덜룩한 비명들

나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지만

출렁이는 무늬를 감춘 그의 등이 바다의 색일 거라 믿었다

 

나지막해지는 자신이 그는 좋다고 했다

깎이고 부러지는 데는 이력이 났다 했다

나는 매일화석이 된 그의 눈물을 캐내어

싱싱한 이파리들을 베꼈다

돛배와 등대를 그리고그가 놓친 여우를 기다렸다

 

그림자를 한껏 젖힌 나팔수 뒤로

복사꽃 그늘을 풀어헤치듯 앳된 여자가 웃었다

 

그림이 완성될 때마다 내 시간도 한 겹씩 벗겨졌지만

핏자국 선명해지도록 나를 벗겨냈다

 

마침내숲 한 채가 송두리째 뽑혀왔을 때

그믐달처럼 휘어진 그를 배에 실어 보냈다

 

바다의 램프를 끄고 그의 상자에 못질을 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바로 나였다는 걸

일생동안,

발가벗겨진 채로 울고 있었다는 것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저자 날짜 조회 수
» 연필의 밤 유미애  2021-07-24 431
243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 백향옥  2021-06-05 752
242 무언의 깊이 신지혜  2021-05-07 937
241 우리가 잠시 바다였습니다 이재연  2021-04-04 1445
240 치자꽃 설화 박규리  2021-02-24 1517
239 카페, 바그다드 한석호  2021-01-16 1983
238 12월의 시 file 최연홍/워싱턴문인회 초대회장  2020-12-25 2108
237 거미줄 file 마혜경  2020-11-22 2472
236 안개마을 건너, 바그다드 file 김밝은  2020-10-28 2151
235 무엇이건 고여 있는 곳이면 file 황동규  2020-09-30 2426
234 풍경風磬 file 박무웅  2020-09-07 2237
233 침묵 속에서 file 파블로 네루다  2020-08-10 3010
232 바람의 편린 file 김송배  2020-07-27 3300
231 등뼈 서랍 file 이선희  2020-06-26 2959
230 워싱턴문인회 창립 기념시- 봄비/최연홍 file 최연홍/워싱턴문인회 초대회장  2020-06-08 2948
229 식탁 모서리에 컵의 가족사가 있다 file 마경덕  2020-04-28 3049
228 말의 힘 file 황인숙  2020-03-22 3634
227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file 류시화  2020-02-21 3465
226 의자 file 홍 철 기  2020-02-01 3603
225 물푸레 동면기 file 이여원(李如苑)  2020-01-21 3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