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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함돈균(문학평론가)

 

세계의 끝과 사물의 생일

ㅡ시집,『생년월일』 2011년, 이장욱 『창비

 

                                       

 

                                                           함돈균(문학평론)

 

 

 

 

  지금으로부터 십여년 전 여름, 우리 시단에 소리없이 당도한 한 수상한 풍경은 이렇다.

  용서를 빌러 그곳에 갔네 그곳에 오래 앉아 있었으나 깔깔한 모래들 아직도 내 잠 속 떠나지 않네 삼 분 전의 잠에서 깨어 삼 일 전의 기슭을 배회하는 자 삼 일 전의 잠에서 깨어 삼 년 전의 목마름을 기억하는 자 그리고 모래산 죽은 그대의 모래산

—「삼 분 전의 잠」 부분, 『내 잠 속의 모래산           

 

  이것은 용서 혹은 죄의식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꿈 또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인가. 이 풍경

속 공간인 “그곳”은 어디인가. 이 풍경 속 시간은 “삼 분 전”인가, “삼 일 전”인가, “삼 년 전”

인가. “다시 눈을 뜨면 문득 머나먼 나날을 지난 어느 날 같은. 눈을 뜨면 아직도 나는 이상한

나라에 갇힌”(「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내 잠 속의 모래산』) 이 풍경은 대체 어디에서

당도한 풍경인가. 이 시집에 실린 가장 서정적이면서도 명료한 시인의 전언인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이 고요한 세상을 처연히

흩날리도록”(「꽃잎, 꽃잎, 꽃잎」, 『내 잠 속의 모래산』) 하겠다는 말을 듣고서도, 당시

우리는 그 전언의 속뜻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2006년, 시인으로부터 또 한 권의 시집이 배달된다. 그것은 ‘나’의 ‘실종’에 관한

이야기. “나는 조금씩 너에게 전달되”고, “나는 내 바깥에서 태어”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그런 이상한 이야기(「실종」, 『정오의 희망곡』). 그러나 ‘나’를 둘러싼

이 ‘실종’은 히어로의 ‘납치’에 관한 드라마틱한 서사도 아니고, ‘소멸’이나 ‘허무’ 같은 이른바

서정적 자아의 익숙한 정서를 담고 있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이를 ‘소외’(그것이 맑스적인 것이건

카프카적인 것이건 간에)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시집 해설에서 이광호가

“탈인칭의 사랑”을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고 말한 이 새로운 “실종 사건”은 서사와 전래의 서정,

한편으로는 그동안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고 손쉽게 나뉘던 종래의 미학적 영토 외부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정녕 이 사건은 ‘외부’에서 발생한 것인가. 한 명의

탁월한 비평가이기도 한 시인은 언제나 서정의 “내파”와 “갱신”을 주장하지 않았던가(『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하지만 비평가로서(였던) 그의 주장이 무엇이었건 간에 그것은 이 자리에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실종 사건’의 효과다. 이 사건 이후,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연쇄폭발한 일련의

시적 사건들에 의해 시적 화자인 ‘나’를 ‘서정적 자아’라고 관습적으로 부르는 일은 이제 너무

올드한 일이 돼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는 어떤 비평적 유행을 추수하자는 식의 얘기가

아니다. “너에게 전달되”고 “내 바깥에서 태어”나며 “사라지기 시작하”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거대한 나’의 시대였던 1980년대가 막 지나간 1990년대 중반, ‘나’에 대한 시적 의심의 몇몇

선구적 사례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선구적인 직관과 기미들은 2000년대에 비로소 증후가

아니라 또렷한 사건이 되어 회귀한다.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온 ‘나’를 더는

‘에고’(ego, 자아)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시대. 이것이 2002년 여름, 그리고 일군의

2000년대 동료들과 더불어 2006년 이장욱의 그 ‘실종 사건’이 야기한 시적(‘정치적’) 효과다.

  그러나 여기에서 실종된 것은 ‘에고’뿐인가. 우리가 이제 얘기를 나눌 그의 세번째 시집을

위해서라도 저 2002년이 예비한 ‘서정적’ 전언에 다시 한번 주목해보자.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온 ‘나’의 처소는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이 고요한 세상”이다. 그러므로

‘나’가 실종되는 자리에서는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이 고요한 세상” 역시 “흩날리”게 된다.

실종되는 것은 ‘나’만이 아니다. ‘나’의 처소였던 ‘정교하고 고요한 세상’도 돌연 사라진다. 그러나

이제 2002년의 여름처럼 더이상 “처연히”는 아니다! 그것은 “마침내 피 묻은 시간”

(「일종의 밤」) 속에서, “일기예보”와 “오늘의 뉴스”(「흘러넘치다」)라는 세계에서, 보험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과 군중의 ‘무한한’ 틈바구니에서 고전적 서정의 아우라를 휘발시킨

채 “아주 구체적인 사건”(「일종의 밤」)이 된다. 예감이 ‘현실’이 되는 자리, 모호한 낭만성과

기이한 서정이 모던한(‘동시대’라는 뜻이다) 일상 속 구체적인 사건으로 탈취(脫臭)되고

귀환하는 그 자리에서 “먼 곳을 담고 있는 가까운 것”(「다섯시에서 일곱시까지의 끌레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랫동안의 ‘실종’ 사건이 ‘생일’로 되돌아오는 그 자리, 거기에서

‘태어나고’ ‘출현하는’ 불가해한 ‘그것’에 관한 것, 이게 바로 이장욱의 세번째 시집 『생년월일』

이다.

 

 

  불안은 언제나 생일 다음에

 

  한국시에 유례가 없던 드라이한 저음으로 ‘나’와 ‘정교하고 고요한 세상’의 실종에 대해 발화

하던 그의 이번 시집 제목은 ‘생년월일’이다. ‘생일’이라니. 이것은 그 시적 세계의 모종의

방향선회를 암시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즉각적인 해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무언가

태어난다면, 그 ‘생일’의 순간을 확인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까.

 

  저 바다 너머에서 해일이 마을을 덮쳤다. 바로 그 순간 생일이 찾아오고, 죽어가는 노인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연인들은 처음으로 입을 맞추고,

  케이크를 자르듯이 수평선을 잘랐다. 자동차의 절반이 절벽 밖으로 빠져나온 채 바퀴가 헛돌았다.

—「생년월일」 부분 

 

  “해일이 마을을 덮”치는 “바로 그 순간 생일이 찾아”온다. 적어도 이것은 당신이 예상한

‘탄생’에 관한 얘기는 아닐 것이다. ‘생일’은 느닷없이 “찾아오고”, 그것은 무언가의 끝

(노인의 죽음)과 시작/탄생(첫 키스)에 모두 관여하는 사건이다. 눈여겨볼 점은 “바로 그

순간” ‘드러난’ “자동차의 절반이 절벽 밖으로 빠져나온 채 바퀴가 헛돌”고 있는 현장이다.

이것은 ‘생일’의 효과일 뿐만 아니라, 끝과 시작에 동시적으로 관여하는 ‘생일’의 성격 그 자체의

현시라고 해야 한다. ‘고요한 도로 위에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자동차들’이 느닷없이 “절벽 밖”에

바퀴가 걸친 이 위태한 상황이 그 효과라면, 절벽 위의 이 ‘생일’ 풍경은 고요한 일상의 ‘끝’을

현시함으로써(‘절벽’ 자체가 ‘정교하고 고요한 세상’의 ‘끝’을 드러내는 이미지다) 이 풍경 속으로

어떤 실재적인 것(the real)을 소환하고 있다. 이 시집의 다른 대목에서 화자가 “바퀴 달린

것들에게서 배울 수 있을까, 방향이라는 것을. 회전의 힘을. 뒤집힌 자동차 속에서만/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목격자들」)고 읊조리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라고 할 수 있다.

  ‘생일’이 ‘해일’을 동반한다면, ‘생일’이 찾아오고 난 후에는 반드시 ‘불안’이 엄습한다.

 

  당신이 입을 벌리는 순간 

  생일에 대한 이야기가 솟아난다 

  그다음엔 언제나 불안에 대한 이야기 

  —「당신이 말하는 순서」 부분 

 

  “당신은 곰곰 생각하고 생각한 후 간신히/생일 다음에 오는 불안에 대해/긴 이야기를 시작

한다”(「당신이 말하는 순서」). 이유를 바로 아는 일은 역시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이 시집에 한정하여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생일’에 대한 이 시집의 이야기는 “언제나 불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생일-불안’이라고. 이 지점에서 직관에 관한 한 위대한 시인들의

반열에 있는 프로이트와 하이데거가 거의 비슷한 시각에서 ‘불안’에 대해 말했던 사실을 상기해

보는 일은 자연스럽다. ‘불안은 유일하게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직관. 거두절미

하고 그 관점을 우리 식으로 차용한다면, 불안은 망각된 것, 은폐된 것이 회귀하는 증상이며,

실재가 아닌 상상적(환상)인 것,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앎’과 관계한다. 불안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결코 속이거나 은폐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앎’이다(‘것’〔thing/das Ding〕을 ‘사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왜 여기서 ‘것/사물’이라는

표현을 강조하는지는 뒤에 가서 알게 될 것이다). 누가(무엇이), 누구를(무엇을) 속이는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틀린 방식이다. 여기서 서술어 ‘속이다’의 주어와 목적어는 공속

(co-existence)하기 때문이다. 속는 것과 속이는 것은 같다. 그러나 ‘불안’은 끝내 속지 않는다

(속일 수 없다). 거기가 회피할 수 없는 어떤 실재적인 것이 출현하는(태어나는) 자리라는

뜻이다.

  이번 시집에서 ‘생일’이 끝과 시작(탄생) 또는 느닷없는 어떤 실재적인 것의 출현 모두에

관련된다면, 언제나 ‘생일’ 이후에 찾아오는 ‘불안’이 드러내는 것 역시 그것과 관련될 것이다.

이 시의 ‘불안’에서 어떤 기만적인 것의 불가능성, 은폐된 것이 파열되는 어떤 순간에 관한 시적

예감을 감지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생일-불안’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다음과 같은

전형적 세계 풍경을 화자가 세계의 ‘끝’이라고 말하는 게 우연일까.

 

 

  세계의 끝, 벗어나는 ‘그것’

 

  두 손이 나를 사육한다. 두 발이 나를 길들인다. 나는 정확하게, 

  보폭을 유지한다. 건너편의 건너편의 건너편을 향하여, 

  붉은 등이 켜지면 외로운 자들만이 읽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되기 위해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여행이란, 

 

  횡단보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나의 왼발이 그의 오른발에 섞여들고 그녀의 표정에 그의 시선이 뒤섞이는 지금을,

  세계의 끝이라고 부르자. 신발의 종류와 헤어스타일, 그리고 교우관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는 세계. 나는 이윽고, 

 

  남녀노소가 되었다. 그녀는 혼자 외우기 좋은 주문을 알게 되었고, 그는 개들의 침묵을 이해했으며, 나는 십년 전 어느날의 중얼거림을 똑같이 반복했다. 여기는 어제의 힘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곳. 신호등은 빨강 초록 주황 빨강,  

  외로운가?

—「세계의 끝」 부분

 

  ‘생년월일’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시집 속의 가장 전형적인 세계 풍경이다. 이 시집의

‘생일’(生日)이 태어남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일상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일상이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생일’을 지속하고 있는가에 관한 얘기가 아닌가. 손발의 사육과

길들임, 안전지대의 확보(“횡단보도”), 상품 관계가 매개하는 예상가능한 취향과 옵션들

(“신발의 종류와 헤어스타일”), 그리고 교환가치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교우관계들의 세계.

이제 우리는 이 “완성되는 세계”에서 너나할 것 없는 “남녀노소”가 된다. 신호등의 색깔들처럼

반복되는 이 세계는 어제에서 오늘에 이르는 축적과 관성과 패턴으로(만) “완성되는 세계”.

화자에 따르면 “인생이란,/적절한 거리에 은행이 있다는 것. 누군가 인출기의 버튼을 누른다는

것”(「목격자들」), “은행에 들르고/신문을 읽고/버림받은 강아지처럼 횡단보도를

건너다가/컹컹 짖는 것”(「수요일의 인사」)이다. “우리는 밤마다 종이인형처럼 잠들”고,

“꿈이 없으니” “열광도 변덕도 없이 잘” 잔다. ‘토이’(toy)처럼 “조용히 태엽을 감”고 “목이

빙글빙글/돌아”가면서. “푸른 등이 켜지자 우리는 일제히/횡단보도로 몰려나”(「토이 스토리」)

가 “사랑스러운 인파들”(「평균치」)이 된다.

  “신호등이 지배하는 장소”(「세계의 끝」)의 인파들 가운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사람은 어디서 태어났”나. 바로 “정각과 정각 사이에서. 공과금 고지서와

함께”(「특성 없는 남자」). 이게 “누군가”의 ‘생일’이다. 그것은 태어나고 태어남을 유지하는

“사랑스러운 인파들”과 “남녀노소”가 이루는 세계 그 자체의 존재 형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이것은 세계의 ‘끝’인가. ‘완성되었으므로’. “어디에도 빈틈이 없는 세계는 서류와 비슷”

(「코인로커」)하므로. 그러므로 (횡단보도를 안전하게) “건너간다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세계의 끝」). 이것이 이장욱의 ‘생일’이, 개체들의 ‘탄생’과 개체들이 모여 이룬

세계의 ‘지속’과 그것이 곧 ‘끝’이 되는 세계 풍경으로 ‘드러나는’ 한 방식이다.

  자, 내 화법에 주의해보자. 지금 나는 이 풍경이 ‘생일’로서 ‘드러난다’고 말했다. “어디에도

빈틈이 없는 세계란 그러니까/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나/사망신고서”(「코인로커」) 같은

것이라는 사실은 ‘불안’을 감지하는 자들에게만 ‘드러나는’ 풍경이기에 그렇다. 신호등 앞

횡단보도에 서 있는 “모두가 거리의 문장을 느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욕설에 익숙한 소년소녀

들의 몫”(「세계의 끝」)이기 때문이다. ‘불안’은 ‘생일’을 축복으로 여기지 못하는 자들의

몫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속지 않는다. 아니, 끝내 속지 못한다. ‘생일’을 ‘불안’으로 경험하는

자들에게서 “가정의 평화와 일기예보”와 “오늘의 뉴스”(「흘러넘치다」)와 내일을 위한

보험과 낙천적인 서류더미들로 지탱되는 세계는 ‘끝’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이 ‘끝’에서

궁극적으로 실종된 것이 무엇인지를 (무의식의 수준에서 즉각적으로) 감지하고 있다.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전생이 궁금해지고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공중부양에 관심이 생기고

  그러다 죽은 생선처럼 침울해져서

  짧은 질문을 던지지

  동사무소란

  무엇인가

 

  동사무소는 그 질문이 없는 곳

  그 밖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우리의 일생이 있는 곳

  그러므로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

  동사무소에 가자

 

  (…)

 

  동사무소는 간결해

  시작과 끝이 명료해

  동사무소를 나오면서 우리는

  외로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왼손을 들고

  왼발을 들고

  —「동사무소에 가자」 부분

 

  왜 하필 ‘동사무소’인가. 그곳이 “우리의 일생이 있는 곳”, 다름아닌 ‘생년월일’에 관한

“모든 것이 있는 곳”이기에 그렇다. 그곳은 출생신고에서 시작되어 사망신고로 끝나는 우리의

세계. “시작과 끝이 명료”하고 “간결”한 곳. 그러므로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동사무소”는

“계급과 역할을 분배”받은 ‘남녀노소’가 노동의 사회적 분할을 승인하고, “모두가 동의하는

높이에서”(「평균치」) 사고의 ‘평균치’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등록된’ 세계. 예상불가능한

일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날씨와/아홉시 뉴스와/사물들의 영향관계”(「그라운드」)들로

이루어진 이 ‘빈틈없는 곳’에서도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질문”. 질문의 소멸이

이 세계, 다름아닌 ‘동사무소’가 태어나고 유지되는 핵심 동인이며, 그러므로 여기가 세계의

‘끝’이다. “질문이 없는” 세계, ‘의심’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더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에.

이 ‘끝’은 외부 없는 세계다.

  그러나 다시 한번 묻자. 정녕 더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가. 이 풍경 속에는 일종의

아이러니가 내재되어 있다. 일체의 질문이 소거된 세계의 ‘끝’에서, 문득 솟아나는 저 “죽은

생선처럼 침울”한 표정, 저 “짧은 질문”이 도래하는 순간은 무엇인가. “동사무소란/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출현하는 순간들. 오른손잡이들의 세계에서 문득 “왼손을 들고” 있는 저 “외로운

고양이 같은 표정”은 정녕 아무것도 아닌가. 모든 ‘끝’에는 ‘끝’에 이르러서야 출현하는 어떤

것들의 순간이 있다. 억압 불가능한 것들, 은폐 불가능한 것들, 기만할 수 없는 것들, 어떤

어긋남과 파열의 증후들. 질문이 소멸된 ‘세계의 끝’에서 그 세계 형식 자체를 문제 삼는 이

최후의 질문의 출현은, 세계 자체에 내포된 모순과 적대를 드러냄으로써 유기적 전체로서의

‘하나의 세계’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상적 표지가 된다. 이 증상적 표지는 세계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파열이며, 주체의 입장에서도 제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것’이라니. 이건 주체성을 벗어나는 영역에 속하는 문제라는 의미이다. 예컨대,

 

  당신은 뚜껑으로 닫을 수 없다. 

  모자라든가 자동문 

  오늘의 뉴스로도. 

 

  마치 물로 만든 의자처럼 

  누군가 거기 앉으면 풍덩, 

  빠져버릴 것처럼. 

 

  햇빛이 당신을 넘치고 그녀의 말이 당신을 넘치고 

  가정의 평화와 일기예보 역시. 

  당신은 또 

  당신에게서 벗어난다. 

 

  메뉴판의 메뉴들을 꼼꼼히 읽어가듯이 

  비밀번호를 입력하듯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듯이 

  당신의 정오를 닫을 수도 있겠지만 

  —「흘러넘치다」 부분

 

  정교하게 정렬되어 범주화된 일상의 취향과 옵션들의 목록(“메뉴판의 메뉴들”)이 있다.

오직 당신만의 비밀(“비밀번호”)이 있으며, 몸과 하나가 된 정신의 사육과정(“국기에 대한 경례”)

이 여기 있다. 거기에서 하드트레이닝 된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담지체로서 사회와

분리되지 않는 한몸이 된다. 당신은 ‘하늘-구름’과의 접촉면을 가능한 한 차단한 채 “모자”를

꾹꾹 눌러쓰고 중력 법칙의 상수로 살아간다. 그것은 스스로를 “외국어” “낯선 입모양” “새”

“구름” “의문문” “소년”(「오늘은 당신의 진심입니까」) 등으로부터 단절시키기 위한 당신의

안간힘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당신은 일상의 관성과 패턴들(“자동문”) 위에 거주하고 매일

그곳을 통과한다. 거기가 안전지대이니까. 계량화된 정보와 풍문 들, 이데올로기의 창구(“오늘의

뉴스”)와 매일 얼굴을 맞대고 그곳을 유일한 지식의 접수처로 삼는 것이 당신의 일상이다.

그러나 자꾸 벗어나는 것이 있다. 당신을 향한 말들이, 정보가, 지식이,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이,

당신의 몸이 “또/당신에게서 벗어난다”. “마치 물로 만든 의자처럼”. 이것은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어떤 ‘것’이다. 결코 “당신은 뚜껑으로 닫을 수 없다”. 당신은 당신에 대해, 당신의

삶에 대해, 당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자알 알고 있다!”(「잘 알지도 못하면서」)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또/당신에게서 벗어난다”. “터지는 기침을 막으려고 당신은 얼굴을

찌푸”리지만, 그 순간 “바늘처럼/쏟아지는 것이 있”고, 그 순간 “불현듯 우리는 또다른

세계를 이해”(「피사체」)하게 된다.

 

  좀비들을 향해 총을 쏴대는 오후의 오락실. 나는 너를 알고 있다! 나는 너를 알고 있다! 나는 너를 자알 알고 있다! 괴물들은 언제나 그렇게 외치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부분

 

  여기에서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나는 너를 알고 있다!”고 외치는 “괴물들”은

게임 속의 존재인가, 아니면 “좀비들을 향해 총을 쏴대는” ‘나/너’인가. “자알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기지(旣知)의 세계가 자꾸 ‘벗어나는’ 어떤 것으로 경험되는 순간 돌연 실종되는 것은,

그리하여 ‘수수께끼’가 되는 것은 나와 너, 그러므로 세계 자체다. 이 시를 읽는 독자인 당신은

“좀비들을 향해 총을 쏴대는” ‘나’(?)와 “나는 너를 자알 알고 있다!”고 외치며 느닷없이

덤벼드는 저 오후의 “괴물들”(너?)을 구분할 수 있는가. ‘나’가 ‘너’로, ‘너’가 ‘나’로, 서로

전이되면서 총을 쏘고, 총에 맞았으면서도 계속 덤벼드는 이 죽지도 살지도 않은 기이한

“좀비”는 주체의 형식이 아니라 불가해하고 해소될 수 없는 ‘사물’(thing/das Ding)의 존재

형식 그 자체라고 해야 한다. 오직 명명의 불가능성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세계 속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그것’. ‘사물-그것’은 세계에 내재한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어떤 ‘것’, 전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나 비존재라고도 할 수 없는 수상한 “괴물들”의 존재 방식을 통해 “뚜껑으로

닫을 수 없”는 유기적 세계의 불가능성을 현시한다. “모든 것을 이해할 것 같은 아침이 지나간

뒤에/아무것도 알 수 없는 밤이 오”(「돌이킬 수 없는」)는 이 세계의 ‘끝’은, 그러므로 끝이

아니다. 여기에는 무언가 출현하는(‘태어나는’) ‘것’이 있지 않은가. “깃발과 뼈 사이에 어둠”

(「잘 알지도 못하면서」)처럼, 이데올로기와 ‘객관적 현실’ 사이에 웅크리고 있다가 느닷없이


출현하는 ‘그것’.

 

 

  동거냐, 사육이냐, 사물이냐

 

 시체는 괄호 속에 넣어둘 수가 없다.

  팔이 툭 튀어나오고

  자꾸 혀를 내민다.

  동거냐, 사육이냐, 사물이냐.

  —「늪」 부분
 

  결코 “괄호 속에 넣어둘 수가 없”는 이 “시체”야말로 “사물” 그 자체의 존재 형식이다.

“사물”은 횡단보도 위에 돌연히 놓여 있는 “몇구의 시신”(「세계의 끝」)으로도 출현하고,

“식물들이 안개를 생산하는 수요일”(「핀란드」) 혹은 “수요일 너머”에서 갑자기 돌진해오는

“커다란 트럭”(「수요일의 인사」)의 모습으로도 출현하며, “나는 나도 모르게 손끝에서

자라나”(「다섯시에서 일곱시까지의 끌레오」)는 시간 가운데에도 있다. “아침에는 네 발로

점심에는 두 발로/저녁에는 감쪽같이 사라”지는 “목숨을 건 수수께끼”가 출현하고, “자주

그림자가 사라지고/머리카락만 보이는” “재크의 골목”(「재크의 골목」) 역시 ‘사물’이 출몰하는

곳이다. “오른쪽의 반대편이 사라질 때/먼 곳에서 나의 뒷모습을 보게 될 때”, 그리하여 “나는

왜 조금씩 내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솟아나는 순간들. 그리고 세계의 ‘끝’이라 생각했던 순간에

돌연 목격하게 되는 “내 오른쪽의/무한한 반대편”(「반대말들」)들. “겨울의 원근이 사라진

곳에서” “태어나”는 “뜨거운 이야기들”(「겨울의 원근법」) 가운데에도 ‘그것’은 있다. 따라서

“동거냐, 사육이냐, 사물이냐”라는 질문은, 세계의 존재 형식에 관한 직관을 담은 물음인 동시에

윤리적 정언명령을 내포한 물음으로 보아야 한다. ‘사물’을 사육할 것이냐(세계에 사육될

것이냐), ‘사물’과 더불어 아이러니를 내포한 삶을 살 것이냐, 사물 자체의 존재 형식을 응시

하면서 “그것에 꽂히”고 “불현 듯/그것이”(「오른손은 모르게」) 될 것이냐. 그러나 주체가 그

어떤 존재(실천) 형식을 택하든, ‘그것’은 항상 여기에 있다.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지? 밤길을 걷다가 무슨 말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지? 캄캄해지다가, 

캄캄해지다가, 

  캄캄한 곳을 향해 돌아설 수도 없을 때, 

  너는 괴물 같은 얼굴로, 십자가와 비슷한 자세로, 천둥 번개가 치는 밤하늘 아래, 

  자꾸 거대해졌다. 

 

  등뒤의 세계는 어디에나 있구나. 매일 잠에서 깨어나기를 반복했는데도 다시 밤. 흩날리는 빗방울들을 기준으로 나는 중얼거리네. 궁금한 목소리로.

   의심하는 목소리로. 

  돌이 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인가. 

  모든 사람인가. 

 

  뒤라는 곳은 무한해. 내내 타오르고 있구나. 나는 자꾸 무너지면서 또

  발생하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빗줄기는 팔이 세 개였다가 다리가 열 개였다가 무수한 팔과 다리를 모아 못 박힌 채로 

  무한이 되는 사람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오래 살아온 도시가 재가 되어 있었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처음 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뒤」 전문

 

  당신이 “정각과 정각 사이에서. 공과금 고지서와 함께” 태어난 “누군가”일지라도(「특성 없는

남자」), 그리하여 정면만을 바라보며 “전진 또 전진”(「토이 스토리」)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당신은 “등뒤의 세계는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내내 타오르고 있”는 저 “무한”한 “등뒤의

세계”. “빗줄기는 팔이 세 개였다가 다리가 열 개였다가 무수한 팔과 다리”로 변이되는 이

세계는 “자꾸 무너지면서 또/발생하는 세계”다. 이 세계에서는 ‘너’ 역시 “괴물 같은 얼굴로,

십자가와 비슷한 자세로” “자꾸 거대해”지고 “무한”한 사람이 되리라. “내가 오래 살아온 도시가

재가 되어 있”음을 목격하는 이 “등뒤의 세계”는 “모든 사람”의 소돔과 고모라, 곧 세계의 ‘끝’

이다. 그러나 무한한, “어디에나 있”는 이 세계는 죽음과 더불어 여전히 무언가 태어나고 발생

하는 세계. 가까스로 동거할 수는 있으되, 결코 사육할 수는 없는 세계. 거기는 바로 불가해하고

무한한 ‘사물’이 태어나는 세계다. 이 세계의 끝에서 출현하는 ‘생일’에 관한 “처음 하는 이야기”.

이장욱의 『생년월일』은 거기에서 다시 또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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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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