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민칼럼] 신춘문예의 계절

명실공히 신인작가 등용문 정착
자신만의 개성 살리려 노력해야

 

해마다 연말이 되면 주요 신문이 큰 상금을 내걸고 문학작품을 공모한다. ‘신춘문예’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는 이 문단 행사는 문학을 꿈꾸는 이에게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늘 아득하다. 수많은 문학 지망생이 신춘문예를 기다리며 작품을 가다듬고 여기저기 신문에 투고한다. 그리고는 얼마나 가슴 졸이면서 신년 첫날의 발표를 기다리는지 이 열병을 치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문학의 길을 향한 ‘통과의례’를 이렇게 유별나게 치르는 나라는 달리 없을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상금을 내걸고 문학 작품을 공모한 것은 최남선이 주재했던 잡지 ‘청춘’(靑春)이 처음이다. 이 잡지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1914년에 종합 월간 문예지로 출발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발흥하려는 신문단에 의미 있는 파란’을 기대한다는 목표 아래 ‘현상문예’란을 만들어 독자의 작품을 모집한 적이 있다. 그런데 1920년대 중반부터 민간 신문이 신춘문예라는 이름으로 문예작품을 현상 공모하고 그 결과를 연초에 발표하면서 하나의 문단적 제도로 정착했다.

 

요즘도 주요 신문사들은 신춘문예 제도를 대부분 운영한다. 전에는 일부 잡지사에서도 신춘문예라는 이름으로 문학작품을 공모했지만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신문사에서 운영하는 신춘문예를 보면 시, 소설, 희곡, 평론 등 각 분야별로 작품을 공모해 이를 권위 있는 심사위원에게 심사하도록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매년 신년호에 각 부문별 당선작을 발표한다. 당선작에는 상당한 상금이 돌아가지만 상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선작을 낸 사람을 곧바로 문필가로 대우한다는 점이다. 신문사가 신춘문예라는 제도를 공정하게 운영하면서 역량 있는 신인 발굴의 등용문을 만들어주고 있는 셈이다.

 

우리 문학계의 거장 가운데에는 신춘문예를 통과한 사람이 많다. 소설가 김동리는 1934년 시 ‘백로’(白鷺)가 신춘문예에 입선된 후 1935년 단편소설 ‘화랑(花郎)의 후예(後裔)’가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단편소설 ‘산화(山火)’가 1936년 다시 신춘문예에 당선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소설가 김유정은 1935년 소설 ‘소낙비’와 ‘노다지’가 각각 다른 두 군데 신문사의 신춘문예를 석권함으로써 문단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인 서정주도 1936년 시 ‘벽’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했다. 최근에 세상을 떠난 작가 최인호도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고, 그 후 화려한 명성을 이어갔다. 소설가 황석영, 이문열, 오정희 등도 모두 신춘문예를 통과한 후 유명한 작가로 성장했다.

 

신춘문예는 그 당선의 화려함에도 자기 이름을 제대로 문단에 알리지 못하고 사라진 사람도 적지 않다. 신춘문예 당선보다 그 영예를 지키면서 좋은 글을 계속 써나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운이 좋게 당선된다고 하더라도 문학을 한다면서 어떻게 운수에만 매달릴 수 있겠는가. 한 시대를 살아가는 문학인으로서 자기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피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신춘문예 지망생들은 이 점을 꼭 마음속에 담아 두어야 한다.

 

신춘문예의 열기가 문단 진출 방식이 다양해졌음에도 여전히 뜨겁다. 여기저기 문학창작교실을 두드리는 사람도 많고, 인터넷에 신춘문예 준비생의 모임까지 생겼단다. 모두가 살기 어렵다고 야단인데 문학을 향한 열정이 아직 한구석에 남아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 기분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나 신춘문예 당선을 위한 묘책은 없다. 자기만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 이번 신춘문예에서는 패기 있는 목소리의 새로운 얼굴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권영민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