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문학에 대한 중국 조선족 문학인들의 공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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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섭-





1. 오상순 교수가 정의한 ‘중국 조선족과 문학’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오상순 교수는 <이중 정체성의 갈등과 문학적 형상화(--조선족문학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라는 발표글에서

“중국의 조선족은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으로서 중국의 소수민족의 일원인 동시에 세계 한민족의 일원이기도 한다. ‘조선족’이란 개념도 ‘조선민족’의 약칭이 아니라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에 대한 전문칭호, 즉 국적과 민족출신을 동시에 표시한 호칭이다.”

라며 ‘조선족’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내림으로써 중국의 조선족 스스로 중국 국민임과 동시에 세계 한민족의 일원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뒤이어,

“중국의 조선족은 한반도에 그 뿌리를 둔 한민족의 후예들이며 지금은 중국의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민족적 정체성과 국민적 정체성이라는 이중 정체성을 항상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조선족의 이중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조선족문학도 자연 이중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라며 중국 조선족문학이 조선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과 중국 국민으로서의 국민적 정체성 등 이중성을 나타낸다는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한반도의 국민들이 중국 조선족을 어떻게 생각하고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설정해준 것으로서 시사하는 바 결코 적지 않다.


2. 민족의 뿌리문화와 현실적 문화의 중요성

레비스트로스는 상파울로 대학교수시절 아마존 열대림의 부족을 연구하고 다녀온  기행문 <슬픈열대>에서 미개한 소수부락민들이 현대문명을 가진 국가사회처럼 발달된 법률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일어날 수 있는 분쟁을 현대국가사회의 사람들보다도 더 합리적으로 해결하며 무리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문화란 어느 민족, 어느 집단의 것이 더 우월한가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나 집단이 존재함에 따라 그들이 가지는 문화는 그 자체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순간 이웃 집단에 흡수되거나 멸족됨으로써 그들과 그들이 가졌던 소중한 문화 또한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이에 비하여 유대민족의 이스라엘백성은 2천년동안 흩어져 떠돌이로 살아야만 했던 기나긴 설움의 세월 속에서도 그들의 민족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는바, 이는 다분히 자신들의 문화를 소중히 여겨 간직하고 계승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하나의 민족이 지속되기 위하여 그들 문화를 지키고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할 수 있는데 그중 민족적 정체성은 뿌리의 문화로서, 국민적 정체성은 현실적 문화라는 데서 결코 어느 것도 가벼이 볼 수 없는 가치가 있다.
문화를 간직하고 계승한다고 해서 고형화 되어 멈춘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에 적응하면서 적절히 발전해 나아가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중국 조선족은 그 탄생이 일본이나 미국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의 대다수는 고국을 떠날 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을 굳게 기약하고 월경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그들의 문학 또한 일본이나 미국의 경우보다 망향의 슬픔이 훨씬 더했는지 모른다. 어찌 보면 처음 그들의 문학은 장소만 다를 뿐 우리의 문학 그 자체였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중국의 조선족은 절대다수가 본토에 혈연적 관계를 두고 있었고 영구정착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던 만큼, 해방 후에도 언젠가는 돌아가서 혈육들과 함께 살리라는, 폐부로 갈망하는 귀속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민 1세들은 한생을 혈육을 그리며 고향을 그리며 살아온 것이다. 이러한 망향심리는 시간이 갈수록 짙어져 조선족의 하나의 독특한 심리로 고착되어 어찌 보면 막연하나마 신앙에 가까운 관념형태로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상순, 중국 중앙민족대, <이중 정체성의 갈등과 문학적 형상화> 중에서)


3. 중국 조선족 학자들의 한반도문학에 대한 중립적 시각(평가)

중국 조선족 문인과 학자들은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조선족 문학 또는 재만문학이 아닌 한반도의 문학에 대하여도 끊임없이 연구를 계속하여 왔다.
그런데 정작 우리 자신은 남과 북으로 갈리어 같은 작가나 같은 작품에 대하여도 체제가 다르다는 이유로 전혀 다른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특정한 작가나 작품을 아예 연구 대상에서 제외시켜버리는 심각한 현상까지 벌어지곤 했었다. 바로 이런 문제를 상당부분 들춰내어 중재하거나 중립적인 위치에서 바로잡아주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다름아닌 중국 조선족 문학 관계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중국 중앙민족대학의 이원길 교수는 논문 <북한에서의 한용운에 대한 평가>에서 북한이 한용운, 김소월 등의 문인과 작품의 평가를 왜곡시킨 이유와 그 과정을 체계적으로 적시하기도 했으며, 베이징 대학의 박충록 교수는 저서 <한국민중문학사(조선문학간사)>에서 김소월의 <招魂>과 <山有花> 등에 대하여 비판적 사실주의입장에서 보는 저항적 요소를 평가함으로써 남한에서는 철저하게 견지해온 소월 시 연구의 편향성에 일침을 놓고 있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중립적 견해라기보다 공정한 평가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족 학자들은 민족 언어의 중재에도 기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연변 쪽의 상당수 문인들은 북측의 맞춤법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 중국 조선족 학자들은 남측의 맞춤법을 사용하여 한국어 문헌을 발표하고 있는데, 이제는 한반도 내에서 남쪽과 북쪽이 타협하여 스스로의 통일된 맞춤법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만 남았다.
이는 이데올로기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제로서, 한민족 언어가 세계화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로 혼란을 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중국 조선족 문학인들에게 좀 더 기대하는 것들

위의 몇 가지 예에서 보듯 중국 조선족 문학인들은 그들 자신들의 특징적인 문학 뿐 아니라 한반도의 문학에 대하여도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는 바, 어쩌면 분단된 한반도 내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경우 중국 조선족 문학인들만이 중재하고 해결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김소월의 <父母>라는 시에는 어머니만 있고 아버지는 없다.(아버지의 상실) 그런데도 남쪽에서는 여지껏 “태어남의 비밀을 노래한 것”이라는 등 이해되지 않는 해석으로 가르쳐왔으며, <山有花>에는 겨울을 제외(상실)시키고 있음에도 “사계절의 순환이 어떠하다” 라고 해석하였는가 하면, <金잔디>라는 시는 그 운률이나 내용으로 보아 무척 경쾌하고 미래지향적인 내용임에도 “님을 잃은(사별한) 슬픔을 노래했다.”라면서 ‘深深山川’의 의미를 분석하지 못하여 얼버무리는 해석으로 일관하여 왔으면서도 누구도 이를 사실주의적 입장에서 해석하려 하지 않고 있어 올바를 해석의 기대는 거의 불가능한 지경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중국의 박충록 교수는 저서 <한국민중문학사(조선문학간사)>에서 <山有花>의 새를 ‘의인화된 조선인’으로 해석하였으며, <招魂>에 대하여는,

“시인은 일제에 의하여 강점당한 조국의 이름-‘산산히 부서진, 허공중에     헤어진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을 사람이 죽으면 영혼을 부르는 조선 고대의     초혼의 풍속을 빌어 목놓아 부르고 있다.”

라고 평한 바 있다. 북쪽에서는 이러한 소월 시 작품의 해석방법에 대하여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으나 단지 남측에서만 용납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중국 조선족 학자, 비평가들은 나머지의 소월 시, 이를테면 아버지 없는(상실된) <父母>, 겨울이 없는(상실된) <山有花>, 무척 희망에 찬 시 <金잔디>에 대하여 확장된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족 학자, 비평가들께서는 시 <접동새>와 산문 <春朝>의 내용이 왜 같은지도 어렵지 않게 밝혀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아, ‘정한론(情限論)’에서 탈출하는 소월 시의 새로운 평가에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