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의 시대는 끝났을까?


전통과 혁신 앞에 고민하는 20세기 문학의 아이콘
예술은 메시지뿐 아니라 코드의 창조에서 진화



신춘문예의 시대는 끝났을까? 신춘문예가 가장 유력한 등단 제도였던 시절도 있었다. 신춘문예의 힘은 1월 1일자 일간지라는 상징성에 의존하고 있다. 지금이야 계간지를 비롯한 문학 전문지, 1억원을 호가하는 공모전들 가운데서 신춘문예의 위상이 예전만은 못하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신춘문예는 일종의 상징이자 브랜드로 작용하는 것 같다. “신문에 날 일”이라는 말에 대한 기대감이 문학에 대한 고전적 기대감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문 학에 대한 고전적 기대감은 문학이 가장 지적인 발명품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지식, 교양의 핵심에는 문학이 있었다. 우리는 지식을 쌓기 위해 책을 읽고 교양인이 되기 위해 문학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이야말로 근대 문명의 꽃이었던 셈이다.
   
   2010 년 출판·문화계의 핫이슈는 전자책, E-북이었다. 사실 논의 자체가 2010년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출발은 인터넷, 웹 브라우저가 등장했던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터넷이라는 무한한 공간이 개방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것이 곧 디스플레이의 혁신이 될 것임을 예상했다. “이제 종이책의 시대는 끝났다, 출판의 권력은 사라질 것이다, 1인 미디어 시대가 열렸다”와 같은 추측과 예상, 기대들이 난무했다.
   
   하지만 책은 힘이 셌다. 인터넷이나 웹 브라우저를 통한 글들은 책보다 읽기가 나빴다. 모니터 속 글은 집중력이 떨어진다. 사람들은 중요한 문장을 보면 밑줄 긋고 싶어했고, 책 귀퉁이를 접어 두거나 침대에서 잠들기 전까지 보고 싶어했다. 그런데 모니터는 너무 멀고, 크고, 무거웠다. 모니터를 책처럼 가방에 넣고 다니지 않는 이상 책보다 더 나을 게 없었다. 그래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한동안 전자책을 종이에 인쇄해 읽곤 했다. 이게 뭐람? 이건 전자책인 척하는 정보일 뿐 사실 전자책이 아니었다.
   
   그런데 드디어 2010년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아이패드가 전도한 태블릿 PC의 세계는 말 그대로 쿨했다. 거추장스러웠던 마우스, 어댑터, 충전기 모두 집에 두고 태블릿 PC 하나면 된다. 이것 하나면 책도 읽고, 뉴스도 보고, 게임도 하고, 영화도 볼 수 있다. 드디어 책이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구텐베르크여 안녕, 어쩌면 2011년은 구텐베르크와 결별하게 될 원년이 될지도 모르겠다.
   
   태블릿 PC 덕분에 출판계가 북새통이다. 기술이 새로운 콘텐츠를 요구하고 매체가 문학을 바꿀 것 같다. 세상에 이런 일이? 보수적 지식인들은 그런 콘텐츠는 문학이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흥 미로운 것은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책 자체도 발명품이라는 사실이다. 책이라는 문자 디스플레이 기술은 기억에 의존하는 암기력을 제치고 근대를 차지했다. 물론 책의 형태가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걸렸을까? 대답부터 하자면 500년이 걸렸다.
   
   이 발명 안에는 흰 종이에 검은색 잉크, 선적 배열, 책 하단의 주석과 같은 당연한 습관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 모든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 종이, 책이라는 디스플레이에 맞춰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발전시켜온 결과이다. 태블릿 PC와 같은 디지털 미디어 문학이 지금은 생뚱맞아 보이지만 언젠가 먼 훗날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인식될 플랫폼이 개발될 것이다.
   
   지금은 공지영과 신경숙이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지만 앞으로는 하나의 디스플레이 안에 나란히 전시될 것이다. 지하철에서 공지영을 읽다가 신경숙을 읽기도 하고 그도 아니면 무료로 제공되는 셰익스피어를 다시 읽을 수도 있다. 지금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같은 작가는 페이지를 연달아 넘기면 연속된 이미지처럼 보이도록 하기도 하고 오르한 파묵은 책 속에 실재(實在) 박물관의 표를 넣어 독자를 끌어들이기도 한다. 파격적이지만 이 실험 역시 문자 텍스트, 책의 형태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앞으로 벌어지게 될 실험은 이 형태 자체를 배반하고 전복할 확률이 높다.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주석을 보기 위해 하단이나 책 끝부분을 들추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를 지그시 누르기만 하면 될지도 모른다. 디지털 디스플레이에 맞춰 책, 글쓰기, 문학의 ‘형태’가 달라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당장은 아니다. 말했다시피 책이 완성되기까지 500년이나 걸리지 않았던가? 우리는 지금 종이에서 스크린으로, 매체의 대이동을 목격하고 있다. 그런데 신춘문예는 신문, 문학, 종이로 압축되는 20세기 문학의 아이콘이다. 오래된 제도이니만큼 권위와 역사도 있지만 아마도 어쩔 수 없이 전통과 혁신 앞에서 어떤 고민과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올해도 수많은 신인작가들이 일간지 지면을 통해 이름과 글을 알렸다. 욕심나는 신인작가들도 눈에 띈다. 24살의 젊은 여대생은 원조교제를 하는 소녀 ‘미치’를 통해 미치고 싶은 세상을 그려나가고, 유명 가수의 공연에서 아이를 잃은 한 남자는 전리품처럼 간직하던 담요를 어린 부부에게 건넨다. 세상이 디지털 문명으로 떠들썩하지만 이 ‘어린’ 작가들은 감히 상처를 보고 위로의 말을 써내려간다.
   
   이렇게 당당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젊은 작가들을 보면 어쩌면 새로운 매체 앞에 호들갑을 떤다는 것 자체가 경박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무릇 예술은 메시지의 창조뿐만 아니라 코드의 창조에서 진화해나간다. 박민규는 원고지 쓰기를 무시하고 컴퓨터 글쓰기처럼 엔터 키를 눌러 긴 여백을 소설에 들여놓았다. 박민규 이후의 작가들은 곧잘 이 뛰어난 가독성을 모방했다. 2000년대 한국 소설에 고유한 스타일 하나를 선사한 것이다.
   
   물론 박민규가 선사한 것이 스타일뿐만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메시지는 스타일과 함께 배가된다. 뒤샹이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는 순간 생활용품이 예술품이 되듯이 누군가 스타일을 통해서도 메시지는 진화한다. 달라지는 것은 사유의 방식이지 사유 자체가 아니다.
   
   모든 정자가 아이로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신인들이 작가로 생존해 남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신춘문예는 말 그대로 등단 제도일 뿐이다. 1월 1일자에 실렸던 그 일간지에 다시 또 이름이 실리게 될지도 미지수다. 등단한 신인작가 모두, 신춘문예가 1월 1일의 이벤트로 마무리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나 역시 이 이름들을 언젠가 미래의 문학사에서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간조선 / 강유정 영화·문학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