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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poesie)'시뮬라크르'와 실재實在라는 광원光源

                            

                                           김백겸(시인, 웹진 시인광장 主幹)  

              

 

     

 

 

  (poesie)의 사영射影

 

  수학의 기하학은 점,직선,평면을 원소로 해서 도형의 집합이 되는 공간의 수리적 성질을 연구한다유클리드 기하학은 B.C 3세기에 유클리드가 고대 그리스 수학을 집대성한 기하학 원론에서

시작되었는데 지구를 평평하다고 본 고대세계의 공간관념을 반영한다.

  19세기에 가우스등이 시작한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평행선은 만나지 않는다는 유클리드기하학

5공준을 부정하고 평면상의 두 직선은 모두 만난다는 공리를 세워 다른 체계의 기하학을

세운다. 지구가 타원체라는 사실을 감안해서 평행선은 모두 만날 수밖에 없다고 가정한다. 공간에

관한 성질은 파스칼등의 수학자에 의해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으로 확대되고 유클리드와

비유클리드기하학의 공간은 사영기하공간의 특수사례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공자의 사무사思無邪이론 이래 시학은 문화패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정의되어 왔다. 수학적 해석이 시공간의 지평을 넓힌 것처럼 당대의 천재 시인들은

자신의 시를 설명하기 위해 스스로 시론을 정립하고 시의 전체적인 모습에 해석하나를 보태왔다.

시대마다 다른 문화패턴의 시각으로 투시된 시는 각각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사영기하학은

,직선,평면을 기초로 하는 사영변환 공간 내에서 불변하는 도형의 성질을 대상으로 연구한다.

마찬가지로 시학詩學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불변하는 시의 실체나 영원성을 다루는 학문이다.

포에지(poesie)의 실체가 시인각자의 투시에 의해 드러난 사영射影의 모습이 모든 시의 현

주소이다. 이 시의 모습을 놓고 사람마다 시의 명암과 형태를 달리해서 설명한다. 그 설명이

당대의 독자에게 마음에 들 수도 안들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일반에 관한 규칙과 해석을 고민

하다 보면 언어라는 형식에 의존하는 시의 얼개가 대충 드러난다.

   

 

  언어의 철학적 탐구

 

  비트겐 슈타인의논리철학 논고의 요점은 언어의 기능은 세계를 묘사하거나 모사模寫하는

것이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사실 또는 실재가 있는가에 관한 것 뿐이다. 사실 또는

실재가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말할 수가 없다. 말할 수가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라는 생각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기능을 세계를 반영하는 그림에 비유한다, 그는 경험적 사실과 일치하는

그림의 언어명제는 참이며 경험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그림의 언어명제는 거짓으로 보았다.

이때 이나 존재진선미의 등의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말할 수 없는(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이므로 침묵해야 한다고 해서 선불교의 언어도단言語道斷같은 신비주의 생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사실상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종교적 입장의 철학을 세우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수학과 논리학을 철학의 기초로 삼아 투명하고 명확한 언어명제로 세계를 기술

하고자하는 야심가였다. 비트겐슈타인도 수학적 사유를 좋아했던 러셀처럼 초기에는 일상

언어들이 마치 안개와 같은 다의적 의미로 실제세계를 가리고 있다고 본 까닭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후기 저작인 철학적 탐구에서는 엄밀한 사유의 건축물에서 철학을 해방하고

있다.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언어를 즐기기도 하고 색깔을 비롯한 감각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도

하며 철학적 규칙을 선포하기보다 역설과 우화로서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언어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한 전기철학의 주장을 철회하고 개별적인 언어현상에 본질이라고 할 만한 공통성질은 없다고 수정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명제에 있어 문제가 되는 언어가 일상적인 문맥에서 어떻게 쓰이는 지를 고찰해서 철학적 문제를 해명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언어 놀이의 개념이 등장한다. 단어의 의미는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이 참여하는 삶의 형식에 따라 문맥이 달라진다고 보았다. 정치가들이나 시인들이 사용하는 애매모호하고 다의적인 언어들은 현실세계의 필요에 의해 사용된다. 이 언어들의 규칙은 수학과 같은 정교한 명제의 인공언어들의 체계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어는 더 이상 사물의 복사본으로서의 그림이 아니며 언어의미는 실제세계와 관계를 맺고 삶의 다양한 형식에서 발생한다. 은유와 상징의 언어는 그 나름의 규칙과 게임으로 세계상을 더 풍부하고 전체적으로 드러내는 인간의 삶에 관여한다.

 

 

  소라게

 

  주위에 소라게를 애완으로 키우는 사람들이 있다. 소라게는 자신의 보호를 위해 고둥류의 껍질을

사용하는 특이한 동물이다. 관심이 생겨 인터넷을 뒤져보니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소라게의 대부분의 종은 길고 나선형의 복부를 가지고 있고 매우 부드럽다. 연약한 복부를

포식자에게 보호하기 위해 빈 복족류를 이용한다. 대부분의 소라게가 고둥류의 껍데기를 집으로

사용한다.(몇몇의 소라게는 공간이 있는 나무나 돌을 집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소라게가 복부를

고정하기 위해 고둥류의 중축을 강하게 붙잡는다. 소라게가 성장하면 점차 큰 껍데기를 찾으며

그전의 껍데기는 버린다. 이런 특성 때문에 사람들에게 Hermit crab(은둔자 게)로 불린다. 몇몇의

소라게들은 껍데기가 없이 지내는데 이것은 새로운 껍데기를 찾고 있는 것이다. 큰 소라게가

새로운 껍데기를 찾기 위해 전에 사용하던 껍데기를 버리면 조금 작은 소라게가 그 껍데기를

이용한다. 소라게는 자라면서 점점 더 큰 껍데기를 필요로 한다. 때때로 적당한 껍데기의 수가

부족한 경우가 있는데 이때에 각각의 소라게가 껍데기를 차지하기 위해서 격렬히 경쟁한다.

빈 껍데기의 수는 고둥류와 소라게의 수에 비례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라게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껍질을 뒤집어 쓰고 살듯이 인간도 언어와 관습이라는 껍질을

뒤집어 쓰고 산다. 언어는 일종의 생존도구인 셈이다. 인간의 사유도 바위틈의 꿀을 꺼내고자

막대기를 든 유인원이나 바위 칼이나 돌도끼를 든 원시인간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바위틈의 꿀을 꺼내기 전에 바위틈의 모양과 깊이, 나뭇가지의 길이 등을 머릿속에서 계산한 후에

실행에 옮긴다. 사유는 추상적인 도구의 역할(simulation)을 하며 인간은 이를 언어표현을 통해서

동료에게 자신의 의사, 즉 생각과 감정을 전달한다.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철학자들은 언어는 대상을 지시하거나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생각으로 의미를 생각했으나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고정된 언어의 의미나 본질은

없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말을 배우듯 개인은 문화의 언어게임에 참여함으로써 게임에 내재된

규칙을 배우고 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언어게임에는 도덕, , 관습 등의 사회규범과 일반

문화등의 복합 언어규칙을 포함한다. 이는 마치 소라게가 자신을 보호하는 껍질을 취하고 환경과

조건이 변하면 버리듯이 언어의 의미는 상황과 문화관습의 차이에 의해 달라진다.

여기에서 언어의 의미란 신호등의 표지판과 같이 기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표지판에

반응하도록 훈련된 문화의 규칙과 기술에 적응한 인간의 참여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마야의

상형문자에 반응하도록 훈련되지 않은 현대인은 마야문자를 보고도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그 기호는 대상을 지시하거나 세계상을 반영하지 않는다( 낯선 기호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의미작용은 있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주자의 격물치지格物致知와도 생각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주자는 인간의 앎을 위한

사유의 틀(格物)을 인식의 필요조건으로 보았다. 인간은 언어라는 문화형식(frame)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도록 훈련되었고 (致知)’을 의존한다. 문화형식(frame)은 소라게의 껍질처럼 세계로

부터의 시야를 차단하는 역할도 한다.

 

 

  기호학의 야심

 

  언어를 기호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도들이 있다. 기호학은 언어를 과학적 경험주의나

논리실증의 관점에서 언어의 규칙과 체계를 연구한다.

 

  인간들은 문자를 포함한 상징(symbol)과 도상(icon), 지표(index)로써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으며, 서로 의사를 소통한다. 여기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 내는 행위를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 하고, 의미 작용과 기호를 통해 서로

메시지를 주고 받는 행위를 커뮤니케이션이라 하며, 이 둘을 합하여 기호 작용(semiosis)이라

한다. 기호학은 엄밀하게 말하면 이 기호 작용에 관한 학문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는

기표(記表:signifiant)와 기의(記意:signifie) 그리고 기호 자체로 구성된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꽃을 선물했다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기의이고, 꽃집에서

산 장미꽃은 나의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 곧 기표가 된다. 곧 기의가 기표와 결합하여

사랑을 표현하는 기호를 만들어낸 것이다. 장미꽃을 받아 든 사람은 그것을 선물한 사람의

의도를 해석한다. 이때 발생하는 현상을 의미 작용이라고 한다. 기표로써 기의를 표현하는 쪽뿐만

아니라 기표를 대할 때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쪽에서도 의미 작용이 일어난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호학은 인간의 문화 정신생활 전반을 모두 기호체계로 해석하고 인간은 기호의 요람에서

태어나 기호의 무덤에서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호학은 언어사용으로서의 파롤(parole)

언어사용의 저변에 깔린 묵시적 차이와 결합법칙으로서의 랑그(langue)의 부분집합으로

생각한다. 기호학자들은 인간이 랑그(langue)의 잠재적 언어체계 내에 갇혀 있고 언어를 통해서만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세계내의 삼라만상을 기호학의 체계에 가두고자 한다.

 

 

  기호체계로서의 주역周易

 

  세계운동과 현상을 기호의 체계로 가두고자 시도한 것이 동양의 역이다. 주역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의 연산역連山易, 의 귀장역歸藏易은 일찍이 없어지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주역周易의 기호체계이다.

 

  한대(漢代)의 학자 정현(鄭玄)역에는 세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간(易簡)이 첫째요,

변역(變易)이 둘째요, 불역(不易)이 셋째다라 하였고, 송대의 주희도 교역(交易변역의 뜻이

있으므로 역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이간이란 하늘과 땅이 서로 영향을 미쳐 만물을 생성케 하는 이법(理法)은 실로 단순하며,

그래서 알기 쉽고 따르기 쉽다는 뜻이다. 변역이란 천지간의 현상, 인간 사회의 모든 사행(事行)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뜻이고, 불역이란 이런 중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줄기가 있으니 예컨대,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해와 달이 갈마들어 밝히고 부모는 자애를 베풀고 자식은 그를 받들어

모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주희의 교역이란 천지와 상하 사방이 대대(對待)함을 이르는 것이고, 변역은 음양과 주야의

유행(流行)을 뜻하는 것이라 하였다. 설문 說文에는 역이라는 글자를 도마뱀(, 守宮)이라

풀이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는 그 상형으로 은 머리 부분이고 아래쪽 은 발과 꼬리를

나타내고 있다. 도마뱀은 하루에도 12번이나 몸의 빛깔을 변하기 때문에 역이라 한다고 하였다.

, 역은 일월(日月)을 가리키는 것이고 음양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이상 여러 설을 종합해

보면 역이란 도마뱀의 상형으로 전변만화하는 자연·인사(人事)의 사상(事象)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역은 우주본체(태극)를 음양의 운동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태양太陽, 소양少陽, 소음少陰,

태음의 사상四象으로 구분한다. 사상四象에 다시 음양을 곱해 팔괘八卦 변화를 만들었는데

, , , , , , , 이다. 이와 같은 체계는 우주만물은 하나에서 나와

하나로 돌아가는 유기적 변화의 구조이고, 현상세계는 모두 상대적 음과 양의 대극對極으로

존재하며, 존재와 변화는 사상四象, 팔괘八卦, 육십사괘六十四卦의 형식으로 존재와 변환을

거친다는 형식논리로 출발한다.

  과거에 주역을 공부했던 고대의 학자들은 이 기호형식이 세계내의 모든 문제를 설명한다고

믿었다. 현실에서 공명을 얻지 못했던 공자는 운명의 이치를 찾아 가죽 끈이 세 번 끊어지도록

주역을 참구해서 지천명知天命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공부라면 둘째가로서는 섭섭한 다산

정약용 선생도 만년에 주역사전周易四錢을 썼는데 공간의 변화에 시간의 변화를 더한

사차원의 입장에서 주역을 해석한 책이다.

  주역에 깊이 빠진 사람들은 이 기호형식이 세계의 모든 현상과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지만

현대물리학은 이보다 더 복잡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미립자들의 운동과 원소주기율표상의

원자들의 조합과 해체, 화학물질들의 반응, 거시천문학의 별들의 운동은 현대 물리의 다차원

수리방정식으로도 충분히 기술할 수가 없다.

  기호란 세계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인간의 자의적 사유내의 도구일 뿐 세계전체를 드러낼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어떤 의미로는 자연법칙을 언표 한다는 점에서 기호학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시대의 지배적이었던 과학적 해석들이 무너지고 다른 패러다임이 드러나는

과학의 역사가 인간이 파악한 기호체계의 불완전함을 증명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의 말할 수 있는 것(기호체계의 명제로 세울 수 있는 것)’에 한해 철학의 한계를

정하고자 했던 겸손한 시도가 오히려 의미가 있다.

 

 

  사고형식의 집합

 

  비트겐 슈타인은 신과 존재 진선미 같은 형이상학의 개념들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고 정리하고 철학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종교와 예술등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런 명제들은 인간의 삶의 실천에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는 당대의 재벌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모두 형제들에 나누어주고 본인은 수도승 같은 생활로 자발적 가난을

실천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한 세계의 참모습은 석가가 새벽의 보리수 나무

아래서 각성했을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석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전한다 내가 깨달은 이

은 참으로 증득하기 어렵다. 참으로 심오하여 오로지 현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애욕에 빠져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생하고 인연에 의해 멸한다라는

이치나 모든 애욕이 없어지고 번뇌가 없어진 열반의 경지를 알릴 수 있을 것이랴. 이 법

설한다고 해도 그들은 깨달을 수 없을 것이고 나는 그저 피로를 더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고민했다. 석가는 수행에 의해 깨달은 미묘한 법의 언표가능성을 회의했고 실제로 임종 시에

자신은 한마디의 법도 설한바가 없다고 하여 방편方便으로서의 설법을 행했을 뿐,

언표가능성을 부정했다.

  현실세계의 본성과 실재實在에 다한 물음은 플라톤이래 많은 철학자들이 고민해 온 문제이다.

플라톤은 현상의 종합적 통일을 넘어서 감관과 지성으로서도 파악이 불가능한 이데아(Idea)'라는

관념을 설정했다. 플라톤은 세계질서의 자연현상을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사(mimesis)로 봄으로써

이데아를 정점으로하는 건축이미지의 세계질서를 가정했다. 이런 생각은 아우구스투스의

중세철학과 버클리의 사유, 헤겔의 절대정신과 칸트의 물자체라는 관념론까지 이어진다.

  일반서민들은 경험하는 지각세계와 진리개념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세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석가와 같은 종교적 천재나 플라톤같은 사유의 천재들이 양자를 구분하고 경험세계를 넘어선

형이상학의 질서를 전제한다. 형이상학에 대한 판단으로서의 철학자들의 해석은 형식만 다를 뿐

모두 우주자체의 본성에 관한 질문을 공통점으로 한다. 헤겔의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자기전개로서의 세계운동을 물질의 변증법적 자기운동으로 바꾼 마르크스의 철학도 사고형식의

차이이다. 석가의 법을 필두로 해서 모두 세계자체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추구한

것이다. 사영기하학의 도형처럼 광원光源의 물체는 동일한데 좌표의 차이에 의해 도형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개인마다 추상하는 방법과 스타일의 차이(difference)’가 사고형식의 차이를 만들고

있다.

 

 

  과학과 종교와 예술의 형식

 

  일반 언어의 문법에서 더 나아간 고급상징으로서의 문법체계가 과학과 예술과 종교가 있다. 모두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언어 형식체계가 다른데 다른 말로 하면 상징체계가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과학은 자연현상의 질서와 규칙을 표현하기위한 개념이자 상징이며, 예술은 인간의 사유와

정서를 미적형식으로 드러내는 상징이며 종교는 인간이 세계를 종교적 진리 형식으로 파악한

상징체계를 사용한다.

  과학에서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언어상징이 과학의 지평이 넓어짐에 따라 시대마다 다르게 의미

변화를 겪어 왔다. 미와 종교적 상징의 의미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른 문화적 의미를 인간에게

제공한다. 이런 생각은 언어형식으로서의 문법이 문화적사고의 살아있는 표현으로서 기능하는데

결국 인간의 삶이 자연환경에 반응하는 형식의 하나라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정신 및 언어문법이 과학과 예술과 종교형식으로 다양하게 드러남은 인간의 내면과

의미작용이 그만큼 복잡하다는 애기다. 뇌 과학은 인간의 사고체계가 본능과 욕망을 담당하는

뇌간腦幹과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와 기억과 추상을 담당하는 신피질로 구성되는 모델을 제공

한다. 이 세 기관은 인간의 감각자료를 독자적인 회로방식으로 처리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해석을

통합 공유한다. 마치 과학과 예술과 종교가 다른 문법체계를 사용해서 인간에게 풍부한 인식의

세계모델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과학과 예술과 종교의 상징형식이 다르다고 해서 대상인 세계의 실제가 다른 것일까. 인간은

자신이 포함된 유니버스(Universe)가 연속체로서의 단일한 실재임을 직관한다. 현대 물리학은

플랑크상수로 구성된 시공간의 (string)’들이 약력과 강력, 전자기력과 증력의 네 가지 힘의

형식으로 물리우주를 디자인한 모델을 제공한다. 현대 천문학은 우리태양계가 포함된 약 1250억의

은하계가 빛의 속도로 팽창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모델을 제공한다. 이러한 세계의 본질을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의 일자一者로 직관하고 과학자들은 에너지와 힘의 질서로 구성된

상징모델을 제공한다. 전문분야의 발화주체가 모두 같은 실체를 대상으로 다른 언어상징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시의 형식

 

  오늘 날의 시가 전통서정시에서 포스트모던의 해체시들 까지 다양한 모습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인식지평이 넒어짐과 관계가 있다. 수학의 역사를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혔지만

여전히 일상생활에서는 유클리드기하학을 적용하고 특수한 건축이나 복잡한 기능을 제어하는

시스템 설계 등에 위상기하를 적용하는 형식의 복잡함과 닮아있다.

  위상기하(topology)는 진흙의 집합이 공이나 막대기의 위상으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모두

진흙물질의 불변하는 성질을 공유하는 집합으로 간주한다. 다른 예로 커피 잔의 손잡이 구멍과

던킨 도너츠의 구멍은 구멍이라는 불변하는 속성을 공유하는 한 위상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

한다. 시를 위상기하학의 전개모델을 빌려 설명할 때 전통서정시로부터 해체시에 이르는 현대시의

형식모델에서 불변하는 공유속성을 전제해야 한다. 변하지 않는 시의 근본형식은 무엇일까?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이런 형이상학의 문제들은 언어명제로 드러낼 수 없으므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라고 설명할 것이다. 이 문제를 발터 벤야민의 예술철학을 빌려 설명해보자.

  발터벤야민은 비트겐슈타인과는 달리 진리의 언어를 가정한다. 구약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나라....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라는 문장에서 시작한다.

이 하나님을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나라라고 언명한다. 양자를 종합하면 하나님(조물주)=말씀이니 태초에는

신성한 언어가 세상을 창조한 셈이 된다. 이 신성한 언어는 그리스의 로고스(logos)와 성리학의

와 도교의 무극無極과 불교의 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유추할 수 있는데 사물의 근본

질서로서의 본성本性에 해당한다.

  벤야민의 생각으로는 언어의 본질은 신의 말씀처럼 존재를 있게 하는 창조의 기능이며, 아담이

에덴의 사물에 이름을 붙인 것처럼 사물의 모습을 현전現前시키는데 있다. ‘바벨의 언어이전의

말씀은 모든 사물을 존재케 하는 근원적 힘이 있는 말씀이었으나 바벨사건 이후 언어는

타락해서 이러한 힘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언어에 대한 이 알레고리는 인구가 늘고 인간의

문화가 발달하면서 언어가 사물언어에서 표상언어로 이행하였음을 드러낸다. 언어는 사물의

참모습을 개시하는 힘을 잃어버리고 단지 인간의 자의적 지시기능을 수행하는 도구와 기호에

불과해졌다는 생각이다.

  벤야민은 예술과 시의 언어에 아담의 언어가 아직 살아있다고 본다. 예술은 사물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언어는 이름도 없고 음향도 없는 언어들이며 동시에 사물로 된 언어들이다.

예술형식의 인식은 이 사물언어들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고, 그것들과 사물언어들의 연관을

찾는 시도라고 벤야민은 정의한다.

  위상기하학이 도형의 변환에도 불구하고 불변하는 위상의 속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처럼 시도

벤야민의 생각에 의하면 그 형식과 표현의 자유로움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언어

사물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진리개시의 기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하이데거가 예술의

기능을 진리개시로서의 존재의 탈은폐를 말한 개념과도 유사하다.

 

 

  시인의 길, 신인의 길

 

  예술 일반이 그렇지만 시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시는 시경詩經의 풍, , 부터 현대의

해체산문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형식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시(poesie)라는 광원光源

투사이다. (poesie)는 시대의 스크린에 의해 다르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다. 시인이

한편의 시를 영감에 의해 단숨에 쓰는 수도 있지만 작품이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수정과 퇴고를 한다. 시인이 생각하기에 보다 완전한 시(poesie)의 모습에 다가가기 위해서다.

  현대시의 자유시 형식이 시경詩經보다 더 형식의 발전을 이룬 것일까. 시가 소설이나 희곡의

장르보다 형식의 우월이 있는 것일까. 고전의 위대한 작품들을 보면 형식에 상관없이 드러난

표현과 주제는 모두 시(poesie)의 광원光源을 향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영射影된 작품은 광원의 무한한 밝음과 투영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독자는 작품들이 얼마만큼

미묘한 명도와 채도의 대조로 시(poesie)를 드러냈는가의 기준으로 시의 감동과 심미審美

향유한다.

  인간의 문화에서 세계의 본질이나 실재實在를 드러내는 상징형식도 시대마다 유행을 타는 것

같다. 그리스 시대는 예술이 중세에는 종교가 근대에는 철학이 주름잡더니 근세에는 과학기술이

실재實在의 모습을 더 잘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죽하면 수학의 방법론으로 언어를

분석해서 인간사유의 그림을 검증하겠다고 나선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발흥을 가져왔을까.

  현대 미학은 인쇄술과 사진과 영화의 의한 기호의 대량복사가 예술품의 사본을 매우 싼값으로

유통시킨 이후 원본의 아우라는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이데아 모사인 현실을 또 모사한

예술작품을 '시뮬라크르(simulacre)'라고 경멸을 담아 이야기한 예술작품들이 인터넷에서 무수한

카피로 돌아다닌다. '시뮬라크르''시뮬라크르'가 투사하는 이중거울의 이미지들이 중중무한

重重無限의 늘어선 가상세계의 화엄華嚴에 현대인은 살고 있다.

  언제든지 읽을 수 있는 시들이 인터넷에서 즐비하기에 시집은 팔리지 않고 시 한편의 가치는

감소했다. 장르가 다른 예술작품의 생산이 다양하기에 시형식의 장르의 희귀함도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둔갑시킨 마르셀 뒤상의 이후로 개념만 붙일 수 있으면

백화점에 산더미처럼 쌓인 상품이 모두 예술품의 지위를 획득하는 시대가 됐다.

  현대의 신인들이 시뮬라크르의 미학이 유행이나 창작태도를 지금의 사조와 맞추겠다면 그

역시 자유로운 선택이다. 그러나 시의 복제는 상품의 복제와 영상의 복제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지금의 시는 이미 서점에서 밀려난 시집처럼 상품시장에서 파산선고를 받고 경매처분을

기다리는 중이다. 시인들이 시의 새로운 형식과 철학적 가능성을 발견해야 하는 이유이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 신의 형상금지를 시킨 이유처럼 예술작품이 드러내고자 하는

(poesie)’는 어떤 의미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이라고 생각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예술작품 및 시들이 (poesie)’의 파편과

부분으로서 제작된다. 개별 작품에는 작가의 심혼을 통해 드러난 (poesie)’라는 실재의 모습이

부분으로 들어가 있다. 한편의 시는 시(poesie)의 광원光源을 기준선으로 작품을 투사선으로 하는

홀로그램(hologram)의 시야에 의해 전체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시뮬라크로(simulacre)’

세계는 실재實在라는 광원의 불빛이 없으면 한 순간에 어둠으로 환원된다.

 

 

 

 참고도서

 

 레이몽크,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웅진지식하우스, 2007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아트북스, 2010

 김석진, 대산주역 강의, 한길사, 1999

 라마찬드란, 명령하는 뇌, 착각하는 뇌,시공사, 2012

 다비드 힐베르트, 기하학과 상상력,살림,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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