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쓰기의 어려움


 

우리 사회에 사이버테러 심각하나 피해자는 대응할 길이 없어

이를 통해 받은 상처 소설로 위안 찾고 있어

 

 

 

 

소설은 밥 먹고 사는 일과는 무관하다. 소설 같은 거 안 읽어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산다. 그런데도 소설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인가? 소설이야말로 그 속에 온갖 이야기와 지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국지 한 권을 놓고도 그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온갖 삶의 지혜를 뽑아내 응용하고 있다. 이처럼 소설은 보다 나은 인생을 경영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런 지식습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밥 먹고 커피 마시듯 책을 읽으면 청량한 휴식이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을 쓰는 소설가들의 입장은 어떤가. 소설을 팔아야 밥을 벌어먹고 산다. 회사원이 회사에 출근해 일하고 월급 받는 것이나 공산품이나 농산물 팔아 돈 벌어 쓰는 것과 같다. 취미로 글 쓰는 사람이 더 많은 현실에서는 같은 작가 중에서도 전업 작가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이가 별로 없다. 예언자가 자신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남모르게 노력하는 것처럼 작가도 작품을 팔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이 소비자가 누구인가. 독자다. 독자가 있는 작가는 살고 독자가 없는 작가는 죽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생활 43년 동안 120여권의 책을 써냈다. 책을 내주는 출판사가 있었다는 이야기이고 독자들이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어떤 문학상 하나 받은 이후 난데없는 사이버테러를 당하고 있다. 소설이 무언가. 소설은 있을 법한 이야기를 있었던 것처럼 꾸며내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것도 1천500년 전 가야시대 이야기라면 시시비비 따질 건더기가 없을 일이다. 그런데도 신문 방송까지 부추기고 있다. 처음 낙선자에게서부터 시작된 이 연대적 사이버 테러가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는 안갯속이다. ‘장난삼아 던진 돌에 개구리는 뭐 어쩌고’ 하는 속언처럼 애꿎은 사람만 다치고 있다. 엉뚱한 희생양을 구하기 위해 수상을 사양했다.

우리사회가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되었는가. 사이버테러에 대한 인식이 더욱 심각해진다. 보통사람은 대응할 길이 없다. 치고 빠지는 ‘카더라 통신’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라치면 장본인은 만신창이가 되고 테러분자들은 이미 숨어버린 뒤다. 얼마 전 모 방송국 아나운서 이혼설에 대한 허위 사실 보도로 법의 심판과 처벌을 받은 사건이 아직도 생생한 시점이고 또 어떤 연예인이 자신을 음해하는 댓글을 보다 못해 수사당국에 맡겼다는 보도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남의 일로만 여겼던 일이 내 일이 될 줄이야. 

나는 별 유명인도 못 되는데 올해 두 번씩이나 사이버 테러에 시달리고 있다. 호사다마라는 옛말 하나 안 그르다. 연말연시인데,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해를 설계해야 할 시점인데, 즐거워야 할 시간인데, 우울하기 그지없다.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이에 다시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꺼내 읽는다. 소설에서라도 위안을 얻어야 한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오스카는 시간을 멈춰놓고 난쟁이로 산다. 드높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아니라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바깥세상을 올려다보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의 차이다. 북치는 소년 오스카는 오히려 구경꾼을 감상하며 즐긴다. 

우물 속으로 내려앉고 싶은 심정이다. 하여 소설 속 난쟁이 친구를 불러내 그와 함께 위안을 얻는다. 책읽기의 즐거움이다. 한 편의 소설 속에는 맵고 짜고 시고 쓰고 단 모든 맛이 다 들어 있다. 그중에 하나만 골라 이게 이 소설이라 하면 되겠는가. 이럴 때는 차라리 뒷산을 오른다. 숲속에 가면 오래된 땅기운들이 되살아나고 먼 북소리가 들린다. 이 북소리에 이끌려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여기선 모든 것이 용서되고 불같은 분노도 사그라져 자연치유가 된다. 오늘도 그러한 숲으로 갈 작정이다. 새 해엔 또 새해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기에.


표성흠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