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文人)의 자격

 


눈이 아주 많이 내린다는 대설(大雪)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직 큰 눈 소식은 없으나 이제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의 12월 숫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왠지 모를 쓸쓸함까지 가슴에 밀려든다. 곧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다는 설렘보다는 몸과 마음으로 부대꼈던 한 해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아쉬움과 허전함이 천천히 교차된다. 가고 오는 것과의 인연이 때로는 신비롭다는 느낌마저 든다.

 

해마다 이맘때면 극심한 열병을 앓는 무리들이 있다. 바로 신춘문예의 드높은 관문을 넘으려는 예비문인들이다. 그들에게는 요즘이 탈고(脫稿)를 향한 극심한 고통의 시간이다. 자신을 이기기 위한 처절한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몸부림치는 그러한 시간인 것이다. 장석주 시인은 자신이 쓴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에서 신춘문예 열병을 앓는 예비문인들의 증상을 이처럼 묘사했다. “이 돌림병은 신춘문예 공모를 알리는 사고(社告)가 실릴 때부터 시작하는데, 그 증상은 이렇다. 대개는 안절부절못한다. 밥맛을 잃고, 잠을 설치고, 돌연 침울해지고,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비명을 지르다가도 미친 듯 웃는다.”

 

1925년 동아일보에서 처음 도입한 신춘문예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제도로, 도입된 지 9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여전히 가장 매력적인 작가 등용문으로 통하고 있다. 예비문인들이 이 제도를 통해 자신의 창작 역량을 시험하고 등단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신춘문예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가장 중요한, 신인들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신춘문예 무용론(無用論)도 고개를 들고 있다. 어느 기관에서 신춘문예 당선자 50명의 10년 후를 조사해 보니 단행본을 한 권 이상 낸 작가는 58%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단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소설가 김영하는 ‘10년 안에 신춘문예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그러나 신춘문예 무용론과는 달리, 지금 한국 문단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예지와 문학 단체들로 넘쳐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이 신춘문예를 통한 등단에 실패한 예비문인들에게는 또 다른 방식의 등단 기회가 부여되므로 다행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가 늦깎이 등단 이후에 직접 겪고 들은 한국 문단의 일부 현실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물론 몇몇 권위 있는 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일부 문인들이 한국 문학의 맥을 잇기 위해 고뇌하는 모습은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문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속에서 제대로 인정받는 문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숱한 문예지들은 ‘문학’이라는 허울 좋은 간판만 내건 채 자격에 미치지 못하는 문인들을 마구 배출하고 있다. 이런 현실 앞에서는 필자도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 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특히 이 땅에서만 유일한 등단제도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 가도 의문으로 남는다. 작가는 말과 행동보다는 오로지 고뇌에서 쥐어짠 글로써만 자신의 세계를 표출해야 바람직하다. 창작을 위한 고뇌에는 소홀한 채 무슨 무슨 문학회니 하며 오로지 친목 도모에만 열을 올린다면 과연 진정한 문인이라 할 수 있을까.

 

늦은 감은 있으나 이제부터라도 쉽고 흔한 등단 절차보다는 권위 있는 문학상, 또는 훌륭한 작품집으로 평가 받은 자가 문인의 반열에 당당히 오를 수 있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 필자 또한 언제든 시인 자격증(?)을 반납할 각오를 다지며,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에서 들려준 일침(一鍼)을 되새겨 본다. “문단이 작가의 고독을 일시적으로 달래 줄 수는 있지만 작품을 쓰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울산제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