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평론> 2012 미주시정신



 

                 표절과 패러디 그 형이상과 형이하

                                                 - 표절은 불멸할 것인가

 


                                                                  임창현

                                                              (문학평론가)

 


 


1. 표절과 패러디의 기원과 정의

 

 표절의 어원은 Plagios란 그리스말에서 유래된다. 현대에서 표절의 정의는 라이펜 베르그가 정의한 ‘사상이나 문체의 도둑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990년 롤랑 드 쇼드네가 펴낸 표절사전은 많은 유명작가들조차도 표절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전기한 어원에서도 ‘음흉한, 간교한’이란 뜻을 가진 것이란 걸 부정할 길은 없다.

 

표절(Plagiarism)은 '다른 작가의 작품 전부 혹은 일부를 그 형태 또는 내용에 변경을 가해 자신의 것으로 제시하는 행위‘ 라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형태적 유사성은 물론 기존저작물을 새로운 형태와 표현으로 개작하여 자신의 독창적인 작품으로 내어놓는 경우도(Passing off) 여기에 해당된다.

 

 표 절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결코 새삼스러울 수가 없다. 그것은 문학작품을 하나의 예술적소유물로 인식하기 시작한때부터라고 본다면 이에 대한 도덕성논란 역시 최근에 와서 문학(지망생포함)인구의 점증적 저변확대와 작품의 대량생산 경향에 잇따라 더 심각하게 파생된 문제라고 보여 진다. 이에 대한 도덕적 논란 역시 최근에 와 더더욱 문제가 된 것 일뿐 표절문제의 내적 질문은 오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그 러면 패러디(Parody)는 어떤가. 이 또한 고대 그리스어 ‘노래(ode)를 따라한다(Para)'에 어원을 두고 있다. 근세까지는 특정문학작품에 해학적요소를 가미해 개작한 문학과 음악의 기법으로 통용됐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의미가 모든 예술작품의 원본에 유머를 넣어 변형한 작품을 뜻한다. 가장 흔한 것은 사진이나 포스터, 동영상, 글, 만화 등을 이용한 패러디다. 최근에는 뉴스 패러디까지 나오는 등 그 영역이 확장되는 추세다. 따라서 표절이나 패러디는 단순문학작품에만 국한한 것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패러디의 변천사를 보면 패러디역사 역시 고대 그리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남의 노래를 모방해 부르며 태동됐다. 역사에 기록된 첫 패러디는 그리스시대 호머의 서사시 ‘일

리아드’를 제작한 ‘개구리들과 쥐들의 전쟁’ 이다.

그리스시대 무명작가가 쓴 이작품은 트로이전쟁을 개구리와 쥐의 싸움에 비유해 해학적으로

비꼬았다. 이후 17세기에는 ‘돈키호테’가 출현했고, 18세기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수많은 작품이 나왔다. 이후 근대까진 문학의 한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이나 영화 등 모든 예술작품을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패러디는 정보기술이 발전한 1990년대 들어 등장했다.

 국 내에서 패러디문화의 꽃이 피기시작한 때는 1998년, 억압됐던 정치풍자의 빗장이 풀리던 시기였다. 여기에 본격적으로 불을 댕긴 게 바로 인터넷 패러디신문 ‘딴지일보’다. 국회의원이 졸지에 ‘여의도마담’이 되고 ‘제비’로 전락하는 통쾌한 풍자는 네티즌들을 골수 패러디 팬으로 만들기도 했다. 서울대 홈페이지를 비튼 ‘구라대학교’ 청와대를 ‘한식당’으로 비꼰 ‘청기와’ 같은 사이트가 등장한 일도 있다.

 

 

2. 모방과 쾌감

 

 표 절은 왜 하는가. 한마디로 모방과 쾌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은 이렇게 이른다. “시는 인간적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두 가지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그중 하나가 모방이다. 모방이란 ‘어릴 적부터 인간본성에 내재한 것으로,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모방을 잘 한다는 것이며 지식 또한 모방에 의해 습득된다." 고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쾌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그 설득력 있는 구체적 매체는 사회적 발전과정에서 찾게 된다. 산업사회가 문명사회를 거쳐 가면서 지식과 문화는 상대적으로 상승한다. 형이하를 건너온 인간의 문화적 욕구는 지식과 밥그릇(형이하)에서 예술그릇(형이상)으로 전이하게 된 것이다.

 

 1990 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에 이르러 아파트 단지마다 시인 수필가가 한 사람 없는 곳이 없다가 이제는 동마다 시인 수필가들의 모임이나 동아리가 형성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 같은 현상은 문단의 저변이 확대되어가면서 점차 이름을 앞세우고 싶은 욕구가 각종 매체를 통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가 급기야는 배끼기(모방)를 거쳐 그 쾌감을 채우려는 현실적 욕망에 다다른 것이다. 그 점 이곳 디아스포라사회 역시 같은 정서임 부정할 수 없다. 이민초기 입 막기에 급급했던 시절에서 이젠 머리채우기에 눈을 돌리고 있는 현실과 다를 바 없다 하겠다.

 

 바 로 그 대상이 무엇(문학, 미술, 음악 등)이든 주저 없이 나도 시인, 나도 수필가, 나도 작가, 나도 화가, 나도... 처럼 아마추어 세계에까지 전파되기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그러나 표절은 이 같은 아마추어리즘의 경지를 넘어 프로의 경지라 할 전문가들의 세계에서도 신춘

문예나 권위 있는 문예지의 공모에 심심찮게 표절시비가 일고, 심지어는 당선이 발표되었다가 취소되는 씁쓸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패 러디측면에서도 코미디, CF, 연극, 사진 등에서 요리조리 써먹었다. 그러나 패러디는2000년대 들어 인터넷을 만나 더욱 급진적으로 진화를 거듭했다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패 러디는 꼭 언어를 도구로 한 창작분야(문학작품)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그것은 정치, 드라마뿐만 아니라 다변적으로 사회 모두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서 패러디가 성행하는 이유의 하나로 창의력과 기술을 가진 ‘정보기술 이태백’ 들의 왕성한 활동을 꼽고 있다. 패러디의 주류는 세 가지. 2002년 장안의 화제였던 배칠수의 ‘엽기DJ' 시리즈는 정치 패러디다. 근래 불법 대선자금 수사 때 유행한 정치 무협극 ’대선자객‘도 이 부류라 하겠다. 반면 인기 드라마 대장금의 경우, 그것을 패러디한 잡지표지 ’월간궁녀‘ 같은 건 팬들이 만든 연예물에 속한다고 하겠다. 수많은 변종 패러디를 양산한 ’딸녀‘(딸기를 들고 있는 여자) 나 ’개죽이‘(대나무에 매달린 강아지) 같은 합성사진은 엽기 감각의 유머패러디였다.

 

 초기 패러디는 짤막한 비꼬기 식 코멘트가 많았다. 이즈음 점차 스토리가 가미된 작품들이 많아진다. 그래야 손님(독자/관객)을 더 많이 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형태도 단순한 사진 합성에서 동영상 등으로 진화되어가고 있다. 미국은 ‘총알 판 사나이’(88) 같은 영화 등을 거친 뒤 인터넷 보급과 함께 패러디가 퍼졌다. 빌 클린턴이나 조지 부쉬 같은 거물 정치인, 백악관 등을 풍자한 게 대표적이다.

 

3. 표절행위(Plagiarism)의 공개와 책임

 

 패 러디는 표현기법이다. 따라서 그 표현기법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 정도에 따라서는 명예훼손, 저작권법 침해, 도용 등 다양한 경우의 법적시비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표절과 패러디의 형이상적 분쟁경지다. 형이상이(머리) 일을 저지르고 형이하가(몸) 그 책임을 지는 몰골이다. 이들과 관련된 문제는 표현의 자유와 그 위축, 그리고 한계라는 점에서  전술한 저작권 침해를 비롯, 명예훼손이냐 표현의 자유냐는 법적, 정치적 수순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표절행위는 그 책임에 앞서 공개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앞세우게 된다. 특히 아카데믹한 환경에서 표절행위로 간주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바, 이는 표절의 금기로 발성되고 있다.

 각 종 서지나 인터넷을 통해 얻은 자료의 내용. 저작권(Copyright)이 있는 모든 자료. 참고서의 내용을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배끼는 것. 또는 위의 내용을 본인의 어투로 고쳐서 (Paraphrase) 자신의 의견인양 내용에 포함시키는 것. 다른 사람의 작품을(비록 허락을 받았을지라도) 자신의 것으로 변조하는 것. 자신의 작품(글)이지만 이전에 이미 사용한 것(Self plagiarism). 외국어로 된 작품 또는 자료를 번역해서 자신의 작품처럼 사용하는 것.

이 와 같이 외부로부터 얻은 모든 정보들은 참고로만 삼고 자신만의 순수한 독창적 생각을 창작으로 이어가야 한다. 이상에 열거된 케이스에는 모두 주(footnote)를 달도록 하고 참고물을 참고서 목록(bibliography)에 나열해야할 것이다.

 

 우 리는 지금 무한 복제시대에서 표절의 무한감시 또한 피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몇 번의 클릭으로 국내는 물론 동서고금의 고전 명작들이 내 컴퓨터 안에 고스란히 떠오르는 시대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는 ‘혼성모방론’(混成模倣論)으로 문제를 찝기도 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인간의 한계를 감안한다면 창작품의표절여부에 대한 마지막 판정은 본인 스스로의 고백에 기댈 수밖에 없다 하겠다. 그러함에도 그 대상이 법적으로 책임이 물어졌을 때에는  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게 될 것이다.

 

 4. 표절의 탄생, 그 영원성  

 

 1) 표절의 옹호론과 문제점

 

 표 절에 관한 대표적인 옹호론으로 두 개의 견해가 있다. ‘작가는 앞선 세대의 작가를 표현하는 것이며, 저자의 개념은 오로지 글쓰기를 배합하고 인용, 배끼는 존재’라고 보는 것처럼 표절에 긍정적인 주장을(바르트)하는 경우와, ‘표절은 없다’(장 뤽 에빙)라고 단언하는 이른바 표절옹호론(Apologie du plagiat)이 그것이다. 그러나 작가란 자신만의 세계관을 독창적인 상상력을 통해 작품 속에 드러내는 만큼 새로운 텍스트의 독립성은 아주 중요한 문제로 보아야 한다.

 더 욱이 작가(시인)의 재 모작변용(再 模作變容)의 경우는 대 사회적 이성부재에 관련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라고 본다. 시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처럼 ‘재현상은 그릇된 것이다’ 라는 자크 데리다의 견해를 말하고 싶다면 먼저 모작 내지는 표절에 대한 문제를 밝혀야 할 것이다.

 

2) 논자의 견해

 

 우 리는 흔히 어떤 작품을 쓰고 그 후 다른 선대작가의 작품에서 발상이 아주 같거나 유사표현 내지 문구를 때늦게 발견하고 새삼스럽게 경악하는 경험을 한다. 작가(시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이런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 제 3의 독자는(불행하게도 예의 선대작가의 작품을 이미 대했던 독자의 경우는)그를 단연 표절자라 씁쓸하게 단언할 것이다. 이는 결코 피할 수가 없다. 후발주자라는 점에서 선취특권(先取特權) 앞에 변명의 여지없이 영락없는  표절작가가 되어지고 말 것이다.

 표 절의 문제제기는 바로 여기에서 가장 심각하게 비롯된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진리 같은 명구가 있다.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 낳고 죽고, 나고 지고, 가고 다시 또 오고... 마치 강물 같이, 물여울 같이, 파도 같이, 산 그림자 같이. 오직 윤회의 진리 밖에 설명할 다름이 없다. 그래서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는 전제는 진리로 성립된다.

 

 시대는 바야흐로 비주얼시대를 맞아 시각적 패러디로 부활하고 있다. 만약 보고 있는 그가 장님이 아니라면, 만약 그가 필이 있어 느끼고 있다면, 그건 어찌할 수가 없다.

 패 러디를 즐김의 대상으로 볼 때, 즐거운 감상 대상으로 볼 때, 통쾌한 풍자 속 진지한 화두를 담아낸다면 그것은 오히려 경쟁력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패러디는 무죄일 수도 있겠다. 누가 그에게 보지 말라, 보지도 말고 느끼지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 할 수 있겠는가. 예술에 있어서만은 재판관이 필요 없다. 그것은 판결을 내리는 자가 실은 판결을 받아야 할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창조주가 지은 자연을 보고 듣고 느끼는 대로 말하는데 누가 죄인이 될 수 있겠는가. 자연을 보고 누리는 기쁨과 경탄에는 선취특권이란 게 인정될 수 없다. 예술의 대상에는 선취특권이란 법이 존재할 수 없다. 예술은 자기가 스승을 모방하는 것처럼 할 수 있는 한 자연을 따른다. 따라서 너의 예술은 마치 신의 손자 같아야 한다.(단테) 어차피 ‘예술은 표절이거나 혁명’이다.(고갱)

 

패 러디의 문화적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일반대중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패러디는 자신의 드라마나 영화 또는 배경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표현하는 방법이며 소통의 즐거움을 확대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그런 의미에서 패러디문화는 수용자의 자기표현의 한 방법이며 공유의 문화적 표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창구를 향한 가벼운 발걸음 일 수도 있다. 이는 어느 장르에도 대입이 가능한 환경일 것이다. 분명 패러디와 표절은 문화적가치의 눈으로도 볼 수 있겠다.

 

 표 절혐의를 받고 있는 당사자가 ‘나는(도) 그리 느꼈고, 그리 보았다’ 고 끝까지 양심위에 남는다면 (그의 감각과 시력을) 누가 치죄할 수 있을까.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고(똑같이) 그렇게 느낄 수밖에(똑같이) 없도록 인간의 오감을 만든 신이 유죄일지도 모른다. 마치 모든 어머니가 모든 똑같은 인간(아이)을 출산하고 똑같이 자랐듯.

빨 간 장미를 누가 이미 빨간 장미라 말했다고 어찌 새로 본 자가 빨간 장미라 이를 수 없으랴. 그것에 대한 느낌, 냄새 또한 다르지 않으리라. 결국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는 인식은 부정불가(否定不可)한 또 하나의 현실적 성서다.

 

 모 든 창작물에는 원작이 있다는 종교적 숙명론이 그것이다. 인간은 오로지 신을 닮고자 하는 노력을 죽을 때까지 끝없이 자행(노력)하는 생물(피조)일 뿐이다. 그리하여 ‘창조’와 ‘모방’과 ‘복제’의 구분은 갈수록 그 구분이 희미해진다. 심지어는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유명작가들이 심사과정에서 응모신인들의 소재와 착상을 도둑질해 갔다는 낙방생의 눈물겨운 호소와 역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엄청나게 발달한 창작물의 데이터베이스와 그에 따른 쾌속 검색엔진은 범의(犯意)를 가진 표절들을 아주 짧은 시간에 색출해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제 감시의 눈길이 수십 만 개도 넘는다,

 나 는 ‘누구를 배꼈다’에서 나는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로 진솔(?)한 고백이나 변호로 신의 창조에 의존하려는 순정만이 유예될 수 있을 뿐이다. 표절은 유죄일 수도 있고 무죄일 수도 있다. 유죄는 양심에, 무죄는 신에게 기대일 수 있을 뿐이다.

 

 그 러므로 작가들이여, 신인들이여, 그대가 생각한대로 과감하게 거침없이 쓰라. 그대가 보았는가, 그대가 느꼈는가, 그대에게 생각 되었는가? 그대가 볼 때, 그대가 느낀 대로, 그대가 생각한대로 그대로 쓰라. 패러디를 염두에 두지 말라. 그것은 이미 패러디가 아니다. 그대의 창작이다. 다만 그대가 하늘을 늦게 보았을 뿐이다. 어떻게 풀어 가는가, 어떻게 색을 칠하는가, 어떻게 소리를 바꾸는가, 오롯한 ‘너다움’에 따라 그것은 스스로 반증하게 될 것이다. 조용필의 노래도 나훈아 남진의 노래도 아무나 부른다. 잘 나가는 조영남은 자기노래가 없다. 모두 남의 노래만 부른다. 그래도 모두 그의 노래를 좋아한다. 그것이다. 입 있는 사람은 누구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 노래다. 다만 어떻게 부르는가가 다를 뿐.

‘나는 가수다’도 그렇게 공개된 패러디가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그것에 허심탄회하게 열광한다. 바로 그 변화된 모방과 패러디에.

 

 “나 는 작품이 구상되고 초고를 비망하고 나면 바로 말미에 꼭 날짜를 적는다.” 는 작가가 있다. 예로, 우리의 기억에 아주 가까운 시인 고원과 서울의 성기조 시인이 그들이다. 표절과 패러디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순수한 일종의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필자 또한 그러하다.

인 간은 신의 영원한 표절, 곧 모조품이다. ‘당신의 형상대로 지었음’을 성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먼저 형이상적으로 그러하고 형이하적으로도 그러하다. 바로 정신적 생물학적으로 그러함을 부정할 사유 우리에겐 없다. 오직 표절과 패러디의 재판관은 신 한사람뿐이다.

 

 형 상과 발상, 그것은 모습으로부터 생각까지 온통 신의 그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작은 신이라 불린다. 어찌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다를 수 있으랴. 하물며 사람과 사람 사이 에랴. 논자는 본고의 대미에 대여 김춘수의 발음을 더하며 이 논지를 맺고자 한다.

 

" 시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혼자서 간다. 외로움이 시를 쓰는 사람의 먹이이다. 어쩔 수 없지 않는가. 그것이 시인의 숙명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시인이 혼자라는 말은 시작과정을 두고 하는 말이지 사회적인 뜻은 전연 없다. 시인은 얼마든지 사교가일 수도 있고 마야코브스키처럼 혁명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를 두고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남의 시를 훔칠 때에도 자기의 방법에 따라 훔쳐야 한다. 훔친 부분은 본래의 모습을 떠나 있어야 한다. 훔친 사람의 모습으로 용해돼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된 결과에 대한 책임도 물론 그 (훔친 자)가 져야 한다. 패러디는 그러니까 없는 것이 된다.“*

 거듭 말하지만 시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외톨이다. 그래서 시인의 영광은 언제나 그가 말한 것에 대한 확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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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등단시절>김춘수-나의 습자기회고-모범을 버리기까지(현대시 2001년 2월호 181쪽)

 

 

 

 *임창현

중앙대(법학부)를 나와 상업은행 조사부에서 근무했다(1963~·1978) 은행행보 주간을 맡으며 경향신문과 금융, 은행계 등에 에세이를 썼다. 이민 후(1978) 미주한국일보에 시가(고원, 마종기선) 조선문학에 문학평론(김준오, 윤병로선)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리고’외 5권의 시집과 ‘이별연습’외 3권의 수필집, ‘아니무스의 변명’외 3권의 평론집이 있다. 이 작품집으로 제20회 평론부문한국펜문학상을수상했다. 워싱턴한국일보와 중앙일보(2001~)에 시와 문학에세이를 써왔으며 현재는 중앙일보(2007~)에 시 현장비평 <시가 있는 벤치>를 주간 집필하고 있다.